[경부고속도로 30년]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

필생의 걸작품, 수출주도·인프라 구축의지의 표현

1967년 5월2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6대 대선공약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대국토건설사업은 조국 근대화의 기본설계 중 하나”라고 규정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경부고속도로 건설계획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그가 고속도로 건설을 결심한 것은 3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12월 뤼브케 대통령의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한 박 대통령은 아우토반(고속도로)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렸던 서독의 전후 경제부흥이 아우토반을 토대로 했다는 인식에서다. 그는 스스로 아우토반을 자동차로 달려본뒤 각종 시설조사, 재원조달방법, 건설효과까지 파악했다.


건설의 총 설계사, 전쟁 치르는 자세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총설계사는 박정희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박정희의 근대화 전략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수출주도 경제성장과 국가에 의한 인프라 구축은 그의 양대 전략이었다. 이런 점에서 태평양으로 향하는 창구이자 기존의 최대 항구인 부산과 서울을 최우선으로 연결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른바 ‘서울-부산 축선 우선 개발’이다.

그가 고속도로 건설에 눈을 돌린 것은 철로운송이 거의 포화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 교통이 분담해야 할 중·장거리 수송을 거의 전부 철도에 의지한 탓에 열차 1량을 얻기위해 웃돈을 지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수송비 상승은 필연적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임한 박정희의 자세는 전쟁터로 나서는 듯했고 그만큼 비장했다. “고속도로를 만들어 물자와 인원의 유통을 원활히 하고, 원료생산기지와 공장, 공장과 소비자를 시간적으로 접근시키는 수송체계를 하루빨리 확립시켜야만 뜻하는 대로 경제성장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반대가 심해도 기어이 고속도로를 건설해야겠다.”(정주영의 ‘이땅에 태어나서’중)

건설과정에서 박정희는 최고지휘관과 현장지휘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1967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기간고속도로 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정책입안, 기본·시행계획 수립, 재원확보방안, 부처간 조율 등을 맡겼다. 하지만 1년만에 폐지됐다. 박정희가 직접 전과정을 지휘하다시피하는 바람에 존재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전용차보다 공사차량이 ‘우선’

현장 시찰에서는 공사차량 통행을 위해 대통령 전용차를 비켜세워 대기시킬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 포병장교 출신인 그는 헬기 시찰을 통해서는 구간 구간마다 문제점을 지적하고 보완점을 지시하기도 했다.

당초 3년으로 예정됐던 공기가 2년 반만에 끝난 것은 박정희의 집념과 독려에 힘입은 바 크다. 그는 시찰 현장마다 ‘기간내 기필 완공-대통령 박정희’란 친필메모를 남겼다.

박정희의 경부고속도로 우선 건설은 지역불균형 개발과 지역차별 논란을 낳았다. 연세대 경제학과 이제민 교수는 이에 대해 “당시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재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복수의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 호남은 물동량이 적어 상대적 중요성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이 교수는 그러나 박정희의 국가주도 인프라 건설 노선이 사회간접자본에 그치지 않고 금융분야 등까지 확대되면서 역기능을 낳았다고 말했다.

정치적 공과에 관계없이 박정희와 경부고속도로를 떼놓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아돌프 히틀러가 전쟁준비의 일환으로 아우토반을 건설했다고 해서 아우토반의 가치가 평가절하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경부고속도로가 박정희의 걸작품임을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7/04 19:46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