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야당 탄생, 모리내각 '난향' 예고

日총선서 민주당 약진, 자민당 양당제 구축할듯

일본 정치의 흐름을 살피려면 앞으로도 한동안 자민당에 눈길을 고정시켜야 할 모양이다. 6월 25일의 중의원 총선에서 일본 유권자들은 다시 한번 자민당중심의 정치체제를 택했다.

소선거구 300석, 비례구 180석 등 480석의 주인을 새로 뽑은 총선에서 자민당의 중의원 해산 이전의 271석에서 38석이 줄어든 233석에 머물러 단독 과반수 241석에는 미치지 못했다. 대신 공명당의 31석, 보수당의 7석 등 연립여당 전체로는 271석에 이르러 모든 상임위에서 위원장의 캐스팅 보트를 빼고도 과반수가 되는 이른바 ‘절대 안정 다수’를 확보했다.


공명당 선전, 자민당에 득

단순히 의석이 준 것을 두고 자민당의 패배를 주장하는 시각도 있으나 ‘절반의 성공’이라는 자민당의 자체 평가를 두고 별다른 반론이 없다. 1996년 10월의 총선 당시 자민당은 239석을 얻어 전체 500석의 47.8%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해산전 의석이 271석, 54.2%로 불어난 것은 제1야당이던 신진당의 분열 등 정세 변화에 따른 ‘이삭 줍기’의 결과였을 뿐 자민당의 득표력은 아니었다. 이번에 획득한 233석은 전체 의석의 48.5%로 오히려 약간 늘어났다.

특히 군마(群馬)·후쿠이(福井)현 등 텃밭에서 ‘싹쓸이’를 그대로 유지한 데다 시가(滋賀)·오키나와(沖繩)현 등 이른바 ‘공백 지구’에서 당선자를 냄으로써 전국 47개 광역 자치체에 고른 거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자민당의 눈에 보이지 않는 승리는 조직표 때문이다. 세대 교체로 자민당의 조직표는 줄어 들었지만 그 공백을 공명당이 메워 주었다. 종교단체 소카갓카이(創價學會)를 모태로 한 공명당의 고정표 700여만표가 곳곳에서 벌어진 민주당 후보와의 접전에서 자민당 후보를 살려 냈다.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전총리와 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간사장이 공명당과의 연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것이 적중한 셈이다.

이에 따라 자민·공명당의 연립이 적어도 내년 10월의 참의원 선거때까지는 무조건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에는 한치의 의심도 없게 됐다. 정당으로의 존재 의미가 거의 사라진 보수당은 자민당으로의 통합 가능성까지 점쳐지고 있다.

자민당은 선거 직후 모리 요시로(森喜朗)총리·노나카 히로무(野中廣務)간사장 체제의 지속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반발이 예상됐던 가토 고이치(加藤紘一)전간사장이나 야마사키 다쿠(山崎拓)전정조회장 등 당내 비주류 지도자들도 재빨리 공감을 표했다.


당내 지배력 커진 구 오부치파

일단 7월4일에 발족할 2차 모리내각이 그동안의 선거관리 내각 성격에서 완전히 벗어나 안정 기반을 확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거 직후의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70% 이상이 모리내각의 장기 지속에 회의를 표했지만 당장모리총리를 대체할 인물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토 전간사장이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최대파벌인 구 오부치파의 견제가 너무 강하다.

선거 결과 중의원 의원이 38명이나 줄어 다른 파벌은 모두 세력이 후퇴했으나 구 오부치파는 오히려 1명이 늘어 총 95명이 됐다. 이에 따라 파벌 영수였던 오부치, 후견인이던 다케시타 전총리의 타계에 따른 구심력 저하 우려와는 달리 구 오부치파의 당내 지배력이 더욱 커졌다.

한편으로 모리파가 가토파를 밀어 내고 제2 파벌로 부상한 것도 모리체제를 떠받치고 있다. 모리파는 선거 결과 4명이 줄었으나 8명이나 줄어든 가토파를 1명 차이로 눌렀다. 당내 최대 위협인 가토 전간사장을 견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가토파와 전략적 연대를 맺어 온 야마사키파의 세력이 31명에서 22명으로 줄어든 것도 모리파를 부추기고 있다.

따라서 구 오부치파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전총리를 다시 옹립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한 적어도 당내에서 모리체제를 위협할 요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토 전간사장의 저자세도 예상되는 당내 무파벌 당선자와 무소속 당선자 등 4~7명의 파벌 영입을 앞두고 구 오부치파와 모리파의 견제를 피하려는 속셈이다.

자민당은 노나카 간사장·가메이 시즈카(龜井靜)정조회장을 유임시키고 총무회장만 같은 가토파의 오자토 다다토시(小里貞利) 전총무청장관으로 교체하는 당3역 인사를 마쳤다. 내각 개편에서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외무장관과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대장성 장관의 유임을 결정했다. 7월4일의 개각도 어차피 파벌간의 적절한 안배와 공명·보수당 배려로 끝날 전망이다.


민주당, 제1야당 기틀 다져

‘21세기 일본의 운명을 결정할 20세기 최후의 총선’이라는 거창한 구호와는 달리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더욱이 ‘신의 나라’ 등의 문제 발언을 거듭, 모리내각의 지지율이 15%대로 떨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도 나타났다. 우선은 민주당이 해산전 95석(19%)에서 127석(26%)으로 약진, 1998년 4월 통합 이래 불과 2년여만에 자민당을 견제할 만한 제1야당의 기틀을 굳혔다.

일본 정치는 여야의 분명한 전선이 형성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와 같은 ‘바람’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비유하자면 세대 교체와 투표율 저하의 속도 차이에서 비롯되는 완만한 바람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1996년 10월 총선 당시 무당파층 대부분이 투표에 불참, 투표율이 사상 최저인 59.65%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투표율이 62.49%로 올라간데서 보듯 무당파층 일부가 움직여 민주당에 표를 몰아 주었다.

도시 지역에서 두드러진 민주당의 약진은 선거 직후의 추적 여론조사 결과 무당파층의 60% 가까이가 민주당을 선택한 결과인 것으로 드러났다. 단순 계산으로는 투표율이 70%만 됐어도 민주당이 제1당이 될 수 있었다.

다음 중의원 선거에서 투표율이 그대로 유지되기만 해도 자민당과의 의석 차이를 60석 정도로 좁힐 수 있다. 거대 야당의 탄생에 의한 느릿한 양당제로의 이행을 점칠 수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민주당이 끊임없이 연립여당의 발목을 잡으려 할 것이란 점에서 정국이 잔잔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같은 전망은 선거후의 여론조사에서 유권자 65%가 모리총리 내각에 반대했듯 국민적 기반보다 당내의 과도적 세력균형에 의존하고 있는 모리체제의 성격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도쿄=황영식특파원

입력시간 2000/07/0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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