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순례] 시스코 시스템즈(20)

9년만에 170배 성장…시장가치규모 나스닥 1위

‘강을 건너면 배를 버려라.’ 강을 건너고 난 뒤에도 배에 집착하고 있으면 더이상 길을 갈 수 없다는 의미다. 아집에 사로잡힌 중생을 계도하기 위해 불가(佛家)에서 상용하는 말이다.

경제학에서는 비슷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거래비용(transaction cost) 이론’을 쓰고 있다. 20세기 후반 제도주의 학파의 수장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널드 코스가 내놓은 것이다.

조직발전의 특정단계에서는 걸맞는 특정 조직운용방식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조직내 업무실적 평가와 업무집행에 드는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는 국가든, 기업이든 초기단계에서는 관료제 통제시스템이 효율성을 갖지만 덩치가 커지고 다양성이 심화하면 관료제가 오히려 비효율을 낳는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IMF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화두가 된 재벌개혁 논리도 따지고 보면 거래비용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른바 의사결정 체제 등을 비롯한 경영시스템을 확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대통령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한다는 식으로 비판받고 있는 정치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경영권 분산으로 거래내용 최소화

인터넷 기업의 총아로 각광받는 미국의 ‘시스코 시스템즈’는 경영능력에서도 탁월한 명성을 얻고 있다. 시스코 경영철학의 요체는 거래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경영권 분산에 있다. 중앙으로 집중됐던 권력을 분산시켜 조직 전체가 의사결정권을 갖는 체제를 수립한 것이다. ‘32세의 사원이 한 해에 100억 달러를 지출한다’는 시스코의 경영방식은 경영권 분산이 없었으면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경영권 분산은 사원들이 고도의 자긍심을 갖는 시스코의 독특한 기업문화를 낳았다. 자긍심의 척도 중 하나는 이직률. 지금까지 시스코가 인수한 61개 기업의 최고경영자 70%가 시스코에 남아있다.

시스코가 인수한 기업의 직원 중 이직률은 연간 7%에 불과하다. 포춘지 조사에 따르면 시스코는 1999년 미국 내에서 ‘가장 일하고 싶은 기업’ 3위, ‘가장 존경받는 기업’ 4위에 랭크됐다. 시스코가 올해 3월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치고 시가총액 기준으로 세계 최대 기업이 된데는 이같은 경영철학과 기업문화가 공고한 바탕을 제공했다.

시스코의 성공은 19세기 말 미국 서부개척사를 반추하게 한다. 노다지를 캐겠다고 서부로 몰려들었던 사람 중 금광으로 떼돈을 번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에게 곡괭이와 청바지를 만들어 판 업자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시스코는 인터넷 시대의 곡괭이 제조업체다.

콘텐츠가 아니라 인터넷 관련기기를 생산함으로써 인터넷에 이르는 길목을 장악하고 있다. 시스코는 자타가 인정하는 인터넷 네트워킹 솔루션 제공업체의 세계적 리더다.

시스코가 생산하는 제품은 광역통신망(WAN), 근거리통신망(LAN), 거대도시 지역망(MAN)을 포함한 네트워크 및 라우터, 허브, 스위치 등이다. 컴퓨터와 컴퓨터를 연결해 사용자들이 시간과 장소, 컴퓨터 시스템의 종류에 관계없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라우터와 스위치 분야에서는 세계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굴둑산업 밀어낸 IT산업의 거두

시스코는 세계 75개국에 225개의 사무소를 두고 있다. 직원은 3만589명. 시스코의 연간 매출액은 1990년 나스닥에 상장할 당시 6,900만 달러에서 1999회계연도에 121억5,400만 달러로 급증해 9년만에 170배 이상 성장했다. 시장가치 규모를 기준으로 할 때 시스코는 나스닥에서 시가총액 5,000억 달러.

나스닥 1위 기업이자 세계 3대 기업에 속한다.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굴뚝산업을 밀어낸 정보통신(IT) 산업의 양두마차다.

시스코는 인터넷 상거래에서도 선두주자다. 글로벌 네트워크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모든 고객에게 기업정보 기반구조를 개방함으로써 네트워크를 이용한 경쟁우위를 얻고 있다. 소수의 게이트키퍼(gatekeeper)가 적합한 데이타를 분배하는 전통적 모델이 아니라 사용자가 자립적으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시스코는 네트워크화한 애플리케이션, 인터넷 및 사내 네트워크를 통해 연간 운영비 8억2,500만 달러를 절약하고 있다. 아울러 고객만족도를 높이고 고객지원, 제품주문, 납기시간에서도 경쟁우위를 얻고 있다. 시스코의 일일 인터넷 상거래 규모는 5,000만 달러(제품판매의 88%)에 달한다.

한편의 소설을 연상케 하는 시스코의 출발과 성장은 인터넷 기업의 생리를 보여준다. 시스코의 신화는 1970년 스탠포드대 재학생으로 연인 사이인 샌드라 러너와 레너드 보사크에서 시작된다. 서로 다른 네트워크로 이메일 연애편지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은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함께 머리를 싸맸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라우터였다. 이 라우터는 호환이 안되는 컴퓨터끼리도 메일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한 시스템이었다.

두 사람이 라우터로 벤처기업 시스코를 창업한 것이 1984년. 하지만 두 사람은 1990년 주식상장 후 6개월만에 경영권을 뺏기고 곧 회사를 떠났다. 이들의 조직관리 방식에 부사장 7명이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스톡옵션제 도입, 개방적 기업문화 창조

시스코를 오늘날의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사람은 초기 맴버 중 한사람인 존 모그리지와 현재의 존 챔버스. 모그리지는 스톡옵션제를 도입해 시스코의 개방적 기업문화를 창조했고, 챔버스는 이를 기반으로 시스코를 성장시켰다.

특히 챔버스는 대폭적 권한위임과 함께 공격적 신제품 시장 진입전략으로 시스코를 업계 1위에 올려 놓았다. 챔버스의 신제품 시장 진입전략은 “만들지 못하면 매입하라”는 것.

시스코의 역사는 적어도 벤처기업에 관한 한 창업자는 창업자로서 만족해야 한다는 비정한 생리를 일깨워 준다. 창업자가 반드시 유능한 경영자일 수는 없다. 스스로 앞서지 못하는 창업자는 물러나야 하고,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창업자는 퇴출당한다. 벤처기업의 진정한 역동성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시스코는 한국 경제에도 큰 손이 됐다. 지난 6월26일 하락세를 보였던 ‘인성정보’ 주가가 시스코의 시스템 통합 파트너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하룻만에 6.85%가 오르며 강세로 돌아섰다. 시스코와 시스템 통합 부문 총판계약을 맺고 있는 국내 회사는 이밖에도 대우정보시스템, 쌍용정보통신, LG정보통신, 현대정보기술 등이 있다.

시스코의 한국지사인 시스코 시스템즈 코리아는 1994년 5월1일 설립됐으며 현재 직원 100여명을 두고 있다. 시스코 코리아는 네트웍컴퓨팅지가 선정한 1998년 최우수 고객만족기업에 올라 저력을 과시했다.

시스코 코리아는 정보통신업계 국내 최대규모 행사인 ‘네트워커스’(Networkers)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네트워커스는 사용자 컨퍼런스다. 지난달 방한한 시스코의 CEO 챔버스는 “인터넷 시대에는 기업들이 서로 교류할수록 산업의 네트워크 효과가 생겨 생산성이 누증된다”고 말했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7/1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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