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16)] 강진(下)

기행자가 강진만 깊숙히 자리하고 있는 사당리 당전마을 청자가마터에 도착했을때는 여름장마의 시작을 예고라도 하듯이 장대같은 비가 쏟아져내렸다.

시야가 탁 트이게 정비된 주차장과 1997년 국비지원으로 건립된 강진 청자자료박물관 건물이 주변의 자연환경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기행자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1963년 국가사적지 68호로 지정된 사당리 당전가마터 일대는 1986년부터 강진군에서 고려청자사업소를 개소하여 세계적 문화유산인 청자를 재현하기 시작했다.

옛 청자가마를 발굴복원하여 이 지역에 매장된 흙과 유약을 사용하여 년간 40회 정도 청자를 구워내고 있다. 현재 강진군 고려청자 사업소에는 34명의 인원이 옛 청자문화의 르네상스를 오늘에 재현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2층으로 건축된 강진청자 자료박물관은 이 지역 일대 가마터에서 출토된 초기 청자도편과 최전성기 상감청자, 그리고 쇠퇴기의 청자 도편을 진열하여 방문자에게 청자 발전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에 우리나라 청자 찻그릇이 등장하는 시기는 10세기 경이다. 신라의 장보고장군에 의해 페르시아방면 항로의 길목인 큐슈(九州) 다자이후(大宰府)지역이 장악된 후 이곳 유적지에서 10세기 중국 백자 찻그릇과 우리나라의 해무리굽 청자 찻그릇이 발굴되었다.

일본인이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청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도굴을 자행한 것은 19세기를 전후한 시기였다. 개성 일대에 산재한 고려 왕릉과 귀족 무덤에서 우수한 청자들을 도굴하여 유출하였고 초대 조선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는 유명한 청자의 최대 장물애비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후 청자 약탈붐으로 인해 강진의 청자가마터가 1914년 이왕직(李王職)박물관의 일본인 관장 스에마스(末松熊彦)에 의해 최초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해방후 우리나라 학술조사단(단장 최순우)에 의해 이 지역 가마터가 발굴조사된 때는 1963년 겨울이였고 이때 조사된 가마터 수는 이미 알려진 100여개 보다 많은 153곳이였다.

그후 1991년 정부의 지원과 해강 도자미술관에 의해 강진군 일대 정밀 지표조사 결과 총 188곳의 가마터가 확인되어 청자가마터에 관한 종합보고서가 간행되기도 하였다.

용운리 지역에 분포된 75곳의 가마터는 타지역 가마터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기청자를 제작하였고 특히 10호 가마터는 도편을 버린 퇴적층이 광범위하여 초기 청자의 발전 양상과 상감청자의 발생과정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1980년부터 용운리 당전저수지 축조공사로 인한 청자가마터 발굴이 착수되어 1982년까지 계속되었다. 10-1호 가마는 발굴, 보존처리하여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고 그 규모는 길이가 10.3m, 높이가 80cm인 반지하식 이였다.

강진 용운리 가마터 발굴결과 최하층에서는 중국식 해무리굽이 출토되었고 그 위층 에서는 한국식 해무리굽이 출토되었다.

용운리 가마터는 다른 지방의 청자가마터와 달리 처음부터 많은 재력과 노동력이 투입되어 오랜 기간 실험과 기술적인 연구가 소요된 가마터다. 또한 국가적 차원에서 절대적 지원 아래 청자 생산의 기지로서 강진일대 가마터가 운영되었다고 판단된다.

고려인들은 학이나 구름무늬가 조각된 비색 청자 찻그릇에 차 한잔을 마시고 선종불교의 꽃인 정적(靜寂) 세계로 파토스의 나래를 폈던 것이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7/1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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