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운 자민련, 갑갑한 JP

추락한 위상, '회복' 묘수없어 속앓이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야 살 수 있다.” 7월14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를 마치고 나온 자민련의 한 의원은 “자고 일어나니 우리 당의 위상이 완전히 추락했다는 것을 알았다”고 총선 직후를 떠올리며 원내교섭단체 구성이 자민련의 유일한 활로임을 강조했다.

4·13 총선을 거치면서 의석이 50여석에서 17석으로 줄어든 자민련의 요즘 풍경은 정치무상(政治無常)을 실감케 한다.

우선 자민련의 원내총무는 총무가 아니다. 오장섭 의원은 총무로 임명됐지만 국회 운영문제를 다루는 총무회담에 끼지 못한다. 20석을 얻어 교섭단체를 구성해야 국회의 각종 협상에 참여할 자격을 가질 수 있지만 17석을 얻은 자민련으로서 목소리를 낼 창구가 없다.

본회의 정당대표 연설에도 끼지 못한다. 자민련이 빠짐으로써 과거의 3당대표 연설은 이제 양당대표 연설로 바뀌었다. 국회의 각 상임위에서도 자민련은 간사를 낼 수 없어 정당 차원의 교섭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루아침에 추락한 JP·자민련 위상

또 연간 62억원에 이르던 국고보조금은 연간 23억원으로 줄었다. 총선 직전 159명에 달했던 유급 사무처 요원은 현재 73명으로 줄었다. 절반 이상의 직원을 잘라내는 아픔을 겪었다. 그나마 남은 직원도 6월에는 평소 월급의 절반 가량 밖에 받지 못해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정책연구위원 등 자민련에 할당되던 국회 유급직원 19명의 자리도 사라졌다. 국회가 원내총무에게 매달 지급하던 1,000여만원의 총무실 운영비도 없어졌다. 자민련이 쓰던 국회 사무실도 대폭 축소될 위기에 처했다.

간접피해는 일일이 나열할 수 없다.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함으로써 자민련에 대한 언론의 ‘대접’도 소홀해졌다.

총선 직전 50여명에 달했던 출입기자 수도 절반 이상 감소했으며 자민련에 대한 보도량도 크게 줄었다. 자민련 의원의 영향력도 줄어들면서 그들에 대한 ‘후원금’의 규모도 예전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자민련의 살림이 이처럼 어려워지자 의원들에 할당된 ‘특별 당비’의 부담액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물론 자민련은 총선이후 민주당과의 공조를 부분적으로 복원함으로써 총리·국회부의장 자리와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장·윤리특위위원장을 확보했으나 당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자민련이 교섭단체 구성에 매달리는 이유는 당세 추락에 따른 서러움을 극복하자는 데 있다.

총선 당시 여권공조를 파기했던 자민련은 민주당 이만섭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하는데 협력하는 대가로 민주당으로부터 교섭단체 구성에 협조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민주당과 자민련은 공동으로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20석에서 10석으로 완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국회법을 개정한다면 국회의 모든 일정을 보이콧하겠다”며 민주당을 압박함으로써 국회법 개정안은 운영위에도 상정되지 못한 상태다. 민주당은 16대 국회 초반부터 법안을 날치기 처리해 한나라당과 정면충돌할 경우 득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


‘총리 배출 정당’ 딜레마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교섭단체 요건 완화를 둘러싸고 ‘7대 불가론’, ‘8대 당위론”을 내세워 홍보전을 벌였다. 한나라당은 “자민련을 위한 위자설법(爲自設法)식 법 개정안”이라며 “교섭단체 요건 완화는 양당 구도를 만든 총선 민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자민련은 “어느 당도 과반수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캐스팅 보트를 쥔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이 총선 민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며 “외국에서도 교섭단체 요건이 20명 이상인 나라는 프랑스 인도 이탈리아 정도 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자민련 의원들은 교섭단체 요건 완화에 반대하는 한나라당보다 국회법 개정안 상정에 소극적인 민주당을 더 원망하는 분위기이다.

이에 자민련은 7월3일 의원총회를 열어 “국회법 개정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국회의 모든 표결에 불참하겠다”고 결의, 민주당에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총리를 배출한 정당이 정부가 제출하는 법안 표결에 불참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지적 때문에 자민련은 딜레마에 빠졌다.

자민련의 한 고위 당직자는 “우리 당 총재가 총리인데 정부가 제출한 추경예산안,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에 불참한다면 국민이 어떻게 보겠느냐”고 말했다. 자민련의 다른 의원도 “민주당과의 공조 복원에 응하지 않으려면 총리까지 철수시켜야 되는데 이를 실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7월 13~14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이 부정선거 시비와 남북관계를 둘러싼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정면충돌로 파행을 겪자 자민련은 은근히 이를 즐겼다.

이때 열린 자민련 주요당직자회의는 “한나라당이 4·13 총선 국정조사권 관철 등을 이유로 임시국회를 파행으로 몰고갈 경우 민주당과 단독으로 국회를 운영, 교섭단체 요건 완화를 위한 국회법 개정안을 처리하는 방안을 추진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민주당과의 공조 파기를 배수진으로 친 ‘표결 불참’ 결의와는 다소 맥을 달리하는 전략이다. 어느 길로 가든 교섭단체 구성이란 목표에만 도달하면 된다는 게 자민련의 입장이다.


차선책 ‘소3당 연합’ 물밑 추진

하지만 국회법 개정안이 처리돼 자민련이 독자적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때문에 자민련은 민국당(2석) 한국신당(1석)과 함께 ‘소3당 연합’을 통해 공동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차선책도 물밑에서 추진하고 있다.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JP)는 최근 민국당 한승수 의원과 몇차례 만나 바둑을 두면서 공동교섭단체 구성 방안에 대한 의중을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명예총재가 7월17일 한국신당 김용환 중앙집행위의장과 골프회동을 가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요즘 자민련 일각에서는 지난해 내각제 유보에 반발해 탈당한 김 의장을 자민련 총재로 재영입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자민련 김종호 총재대행이 14일 낮 여의도 한 일식집에서 한국신당 김 의장과 만난 것은 17일의 골프회동을 앞둔 정지 작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3당 연합’이 성사되더라도 조그만 집을 확보한 것에 불과해 자민련 의원들은 장기적으로 편안한 둥지로 느끼지 못할 것 같다.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론이 꾸준히 거론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종필 명예총재는 6월20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회동을 갖고 총선때의 앙금을 어느 정도 해소했으나 합당에는 소극적이다. JP는 일부 의원에게 “민주당에서는 합당을 원하는 것 같은데 외국에서도 연합정권의 예가 얼마든지 있다”며 사실상 합당 반대 의사를 밝혔다.

40여년간의 정치생활중 최악의 정치 위기를 맞은 JP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민주당과의 통합이란 결단을 통해 활로를 찾을 것인지, 아니면 자민련 간판을 지키는 독자 노선을 걸을지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JP가 요즘 바둑과 골프로만 소일하는 것은 정치 구상이 가닥이 잡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JP는 2002년 대선에서 유력 대권주자를 밀어주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한 뒤 정치 인생을 명예롭게 마무리하는 수순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김광덕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0/07/18 19:48


김광덕 정치부 kd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