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레코드판 전문수집·판매상 김세환

"LP속엔 음악의 깊이와 철학이 있지요"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바깥 일도 모르고 산다. 생업이 달린 가게도 열고 싶을 때 열고 일어서고 싶을 때 일어선다. 개점 시간은 특히 들쭉날쭉이다. 전날밤 ‘무사’했으면 오전 10시, 술이라도 한잔 걸쳤다 하면 점심때를 넘기기도 다반사다. 그래서 별명까지 ‘오후반’이다.

사방에 레코드판을 널어놓고도 “여기 오는 손님은 절대 슬쩍하지 않는다”며 태평이다. 문밖에 쌓아둔 레코드도 누가 집적대든 무신경이다.

CD에다 MP3까지 휘젓는 요즘, 모르는 이들이야 고물 취급을 하든 말든 20년째 LP만 껴안고 살아온 고집쟁이. 명함에 뜬금없이 통장 계좌번호를 올리는가 하면 트롯도 헤비메탈처럼 불러대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 잘 기른 머리를 락커처럼 질끈 묶은 불혹의 그가 구호처럼 외친다. “테크놀로지는 발달해도 앤티크는 영원하다.” LP를 우습게 보지말라는 뜻이다.


LP매력에 빠져 대학도 포기

왕년의 인기가수와 이름이 똑같은 김세환(40). 그도 음악으로 밥을 먹고 산다.

LP에 미쳐 대학도 안 갔다. 20대는 LP점 종업원으로 보내고, 30대는 외국까지 들락거리며 LP 보따리장사를 하다가 사십 언저리에서야 얌전히 둥지를 틀었다. 그의 가게는 중고 음반상들이 밀집돼 있는 서울 명동 회현지하상가내 ‘클림트’. 자리잡은지 4년쯤 된다.

처음엔 반토막짜리 가게로 시작한 것을 2년만에 바로 옆의 반토막까지 접수, 두배로 사업확장한 것이 현재의 가게다. 상가 내에서 그는 거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러니 LP점 앞을 지날때마다 사양길 운운하며 공연한 연민을 보내지 말 것. 김씨에겐 오히려 CD가 따를 수 없는 고부가가치로 자랑스럽다. 남들이 열시간 일 할 것도 다섯시간만 바짝 정신차리면 돈벌이가 된다. 은근한 입심으로 손님 스스로 음반을 사고 싶게끔 만드는 것이 LP상의 능력. 그가 일하는 재미이기도 하다.

“LP는 CD에서 느낄 수 없는 특유의 따스함과 예술이 있습니다. 재킷부터 다르고, 소리의 매력도 특별합니다. 또 일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장점도 있죠. 하지만 결국엔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음악이며 사람을 만나는 일이 좋아서 다른 생각을 못 합니다.”

중학 시절 한살 터울의 형이 틀어놓은 음악을 듣다가 덩달아 최면이 걸리고 말았다. 제기동 집과 학교를 오갈 땐 하교길마다 청계천이나 세운상가에 나온 LP들을 구경하느라 늘상 귀가시간이 늦었다. 복사판 3장에 1천원. 용돈이 생기는 대로 레코드에 털어넣었다.

배명고를 졸업, 1985년 군에서 제대하던 날엔 곧바로 음반점으로 달려가 종업원으로 취직해버렸다. 부모의 반대와 꾸지람도 아랑곳 없었다. 청계천에 있는 중간도매상 ‘돌’에서 8년 가까이 일했다.

음반 관리에서부터 구매, 운반까지 거의 막노동이나 다름없었다. 실수도 많았고 무서운 여사장에게 호통을 듣기도 많이 들었다.

“음반 이름을 몰라 헤맨 적도 많고, 원판 값이 헷갈려 밑지게 파는 바람에 나중에 장부정리를 하다가 계산이 맞지 않아 혼이 난 적도 많습니다.

중요한 레코드회사만 몇천개가 되는데 그걸 어떻게 다 외겠어요. 하루 3백만-5백만원씩 돈이 오가는 상황이라 주인이 종업원을 완전히 믿을 때쯤에야 일을 맡기는데, 저도 들어간지 2~3년쯤 지나 창고열쇠를 넘겨받았습니다.

그때 기분은 말로 다 표현을 못하죠. 하지만 그 뒤에도 가장 혼이 난 건 제가 욕심이 너무 많다는 거였어요. LP욕심이 유난히 많아서 물건을 들여놓을 때마다 한번에 너무 많이 들여다 놓는다는 거죠. 참 혹독하게 배웠습니다.”

당시 LP 한장 값이 3백원. 그는 일당 3천원. 한달이면 9만원을 벌었다. 하지만 그 월급 조차 현금으로 온전히 받아온 일이 없다. 스스로 돈 대신 LP로 바꿔왔기 때문이다. 가게는 나날이 번창했고 종업원으로 할 만큼 했다 싶을 때 그는 그야말로 박수칠 때 떠나왔다

. 더 큰 물을 찾아가고 싶었다. 김씨가 발견한 다음 기착지는 명동의 ‘부루의 뜨락’. 한국 LP의 메카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곳이다. 평소엔 원판을 사러 단골처럼 드나들던 곳에 김씨는 아예 종업원으로 들어앉아 버렸다. 어깨 너머로 사업 돌아가는 일도 배우고, 안목도 키웠다.

특히 1988년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작된 이후 그동안 음성적으로 거래되던 밀판 대신 직접 외국을 드나들며 음반을 구매할 수 있게 됐다. 처음 독일 출장을 나간 길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음악이나 레코드에 대한 열정이라면 누구 못지 않다고 자신하던 그였지만 나가보니 우물안 개구리였다. 세계는 넓고 음반은 무한했다. 뭔가 길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원판, 싸게 사서 싸게 팔아

1993년 3월 뜨락에서의 3년 생활을 접었다. 종업원 생활을 마감하고 싶었다. 남 아래 있으면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도 한편으론 피폐해지는 무엇이 있었다. 잠시 쉬고 싶었다. 무작정 집에 틀어박혀 5개월을 보냈다.

평생 처음으로 빈둥대며 살아봤다. 종일 방안에서 음악만 듣거나 책이나 영화를 보며 밤을 지새는 ‘백수의 특권’도 맘껏 누렸다. 황학동 시장을 뒤지며 그림 구경을 다니기도 하고 해남 대흥사 등지를 돌며 여행도 했다.

요즘까지도 휴일만 되면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사고 책을 읽는 등 오래 된 취미생활이다.

잠시 독일에 나간 김에 시험삼아 LP 3,000장을 가져와 팔아봤다. 여하간 신용은 잃지 않았는지 “김씨가 좋은 판을 사왔더라”는 소문이 나자 금새 모두 팔려나갔다. 이거다 싶었다.

1990년대 중반 이미 국내 LP업계는 파장분위기였지만 LP골수들은 여전히 제 자리를 지키며 김씨처럼 LP에만 애정을 퍼붓고 있었다. 얼마간 돈을 벌면 몇 달을 살고, 그 돈이 떨어지면 또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에 나가 원판을 사온 뒤 생활비를 벌며 3년을 보냈다.

이젠 자신의 LP점을 열겠다고 나섰을 땐 빈털털이었다. 답답한 지하상가가 그나마 명당이었다. 처음엔 월세부터 출발했다. 전세금 1,300만원, 보증금 600만원, 월세 30만원짜리. 물건을 많이 갖출 여력도 안 돼 개업 첫날 내놓은 LP가 달랑 선반 두 줄. 인근 상인들이 “곧 망할 것”이라며 장담하고 나섰다.

“1996년 제가 여기 들어올 때만 해도 분위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중고 음반상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한탕주의 같은게 팽배해있어서 뭔가 한건만 제대로 터지면 그만이다,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좋은 판을 값싸게 들여와서 비싸게 팔겠다는 건데 저는 오히려 싸게 사서 싸게 파는 쪽을 택했습니다.

대신 종류를 골고루 가져다놨지요. 원래 원판 위주로만 움직이던 이 일대 LP점 사이에서 라이선스 LP를 가져다놓은 것도 제가 처음일 겁니다. 그 덕분에 2년만에 가게도 늘렸습니다. 개성도, 희소성도 중요하지만 역시 가격 앞엔 장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지하상가도 알고보면 경쟁이 치열한 기업. 최근 3년동안에만 김씨와 같은 LP전문점 10개중 5개가 주인을 갈아치웠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업주들은 그야말로 별동부대다. 음악과 LP에 남다른 철학과 고집이 있는 사람이다. 가게마다 나름의 색깔도 있고 업주끼리 정보도 나누며 선후배처럼 뭉치는 등 공존공생의 꾀가 생겼다.


IMF로 숨은 명반들 속속 구입

IMF위기 때 김씨는 오히려 덕을 보았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평소엔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겨왔을 LP매니어의 숨은 명반이 속속 매물로 쏟아졌다.

현실이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김씨로선 굳이 외국에 가지않고도 좋은 음반을 확보할 수 있어 오히려 행운이었다. 많게는 5,000장까지 싸들고 온 사람도 봤다. 그렇게 사들인 양이 1년 사이 1만여장. 위기란 것이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피부로 실감했다.

아직도 장사를 하다보면 별별 인간이 다 모여든다. 가끔은 자신이 가진 더 늦은 날짜의 발매 앨범을 김씨네 앨범과 슬쩍 알맹이만 바꿔치기해가는 양심불량자도 있고, 간혹 손님이 찾는 앨범을 제때 찾아주지 못하면 다짜고짜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느냐”는 고함부터 “왜 이리 비싸냐”는 시비

심지어 “평생 이 짓이나 하고 살라”는 악담까지 귀가 아프다. 성깔로 치면 김씨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만 손님 상대 십수년.

이젠 후배들로부터 “부드러워졌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인내에도 연륜이 쌓였다. “감정적으로 맞서봐야 결과가 뻔하지 않습니까. 대개는 제가 먼저 숙이고 차근차근 설명을 하면서 풉니다.

사실 음악에 대해선 아무래도 제가 웬만한 손님보다 더 환할 수 밖에 없으니까 음악 얘기로 들어가면 더이상 상대가 저를 함부로 보지 못하더라구요.

하지만 정 안되겠다 싶을 땐 끝까지 잘잘못을 따져서 상대의 사과를 받아냅니다. 절대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대신 그후에 술 한잔 함께 나누면서 앙금없이 또 친해지는거지요. 어떨 땐 ‘너 평생 이거나 해 처먹고 살아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합니다.

진짜 무지 고마운 일 아닙니까. 안그래도 죽을때까지 이 일만 하고 싶은 사람인데, 그만큼 좋은 덕담이 어디 있습니까. 가끔은 손님과 너무 친해져서 오히려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안 고쳐집니다. 차라리 손해를 보고 말죠.”


평생 넘어도 못넘을 음악

음악은 평생 넘어도 못 넘을 산이다. 20년동안 눈만 뜨면 보고 들은 것이 LP지만 현재만 해도 자신이 가진 앨범 3만장 중 최소한 한번이라도 들어본 게 70%나 될까 말까다.

아직 결혼도 못했다. 마음은 지금도 피끓는 청년이지만 유독 여자문제만 취약하다. 어쩌면 그럴만도 하다. 하루 대부분을 가게안에만 틀어박혀 있는데다 입만 열면 음악 얘기만 신나게 늘어놓는 노총각. 여자 하나 잡기가 레코드 수만장 갖기보다 더 어렵다.

무계획이 유일한 계획인 김씨는 앞으로도 거창한 장래 프로젝트 하나 없다. 마음따라 살면 그뿐이다. 다만 올해나 내년중 책 하나쯤 쓰고 싶긴 하다. 이전에도 몇몇 음악 관련 잡지에 글을 실어보았던 잠재적 논객 김씨.

21세기가 아니라 22세기가 닥쳐도 끄떡없이 ‘아날로그 전사’처럼 살아갈 그가 일면 협객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 사회엔 논쟁이 없어요. 다들 인맥이나 안면에 받쳐서 해야 할 소리를 못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국내에 나온 너무도 대중적인 음악서들, 우리 대중을 깔보는듯한 그런 책을 한방에 날려줄 책을 꼭 써 볼 생각입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0/07/18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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