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17)] 진주(上)

일본 호소카와 가문과의 피맺힌 사연

속도와 경쟁만을 추구하는 세상을 살다보니 인간의 마음도 더욱 기계화가 되어가고 있다. 전통과 풍류, 정한(情恨)의 이야기 따위는 한낱 옛사람의 망각의 늪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지난 세월 충절의 전통과 아름다운 풍류의 잔영이 아직 남아 있는 고을 진주로 기행의 발길을 돌려보았다. 일제 암흑기에 작곡가 이제호는 옛 진주의 역사와 정한을 다음과 같은 노랫말로 남겼다.“남강은 잠이 들고 꿈을 꾸는 촉석루, 서장대 성돌 위엔 달빛만이 외로워. 진주라 절세가인 몇몇이나 되느냐.”

지리산 천왕봉의 영천(靈泉)이 모여져 남강을 이룬 진주는 옛부터 충의와 문화예술의 산실이며 학문과 다향(茶香)의 고장이다. 임진왜란 중 가장 비극적인 전투는 진주성 전투다.

우리에게 진솔한 감동을 주고 민족의 꽃으로 산화한 논개를 비롯한 진주성의 7만의 민중과 관군은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전원이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여기 병력 2만을 지휘해 1차 진주성 공략에 나선 일본군 장수 호소카와 다다모키(細川忠興) 가문과 진주와의 400년 동안 피맺힌 사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마모키의 아버지 호소카와 유우사이(細川幽齊)는 일본의 전국시대 차회(茶會)에서 고려 찻그릇을 사용하여 중세 일본 다도(茶道)의 격을 한층 높였고 와카(和歌)의 명인이었다. 그는 무장이면서도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의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유연한 처세술로써 자기 가문을 보호했다. 1592년(선조25년) 10월8일 호소카와 유우사이의 아들 다다모키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간청하여 병력 2만을 이끌고 제1차 진주성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목사 김시민과 관군 3,800명을 위시하여 진주성 주민은 일치단결하여 6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호소카와군 2만을 격퇴시키니 임난의 3대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아버지 때부터 조선에서 구워진 고려 찻그릇을 좋아하여 많이 소장하였던 호소카와 다다모키는 진주성 공략에서 대패한 분풀이로 진주성 인근 지역의 도자기 가마터에서 조선 찻그릇과 사기장인을 마구 약탈 연행해갔다.

임난 종전후 일본으로 돌아간 호소카와는 또다시 내전의 회오리 속에 휩싸이게 된다. 그는 주군인 토요토미의 반대편인 도쿠가와 (德川家康)편에 가담하게 되었다.

1600년 운명의 세키카하라 결전에 앞서 호소카와의 부인 가라시아는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군에 의해 오사카성에 인질로 연금중 남편과 호소카와 가문을 위해 카톨릭 영세자임에도 불구하고 장렬하게 자결했다.

가라시아는 1682년 쿄토 혼노지(本能寺)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암살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딸이며 임난시 조선에 종군신부로 온바있는 예수회 소속 스페인의 그레고리오 세스뻬데스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논개가 문학과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어 민족적으로 사랑을 받듯이 일본에서도 가라시아의 순교가 오페라와 영화의 소재가 되어 오늘날까지 일본인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1993년 9월 평화의 사절로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전 총리 호소가와 모리히로는 구마모토의 호소카와 가문의 후손이다.

그는 역대 총리 가운데 최초로 침략전쟁으로 한국 국민을 괴롭힌 것에 대해 사죄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제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나 딸과 함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언젠가 진주를 방문하여 400년전의 한일간의 아픈 역사의 흔적을 해원상생해주는 좋은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7/19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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