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18)] 진주(下)

남강의 물소리와 사기장인의 물레소리

19세기 서세동점의 벼락과 해일 속에서 부패와 무능한 조선왕조는 조락하고 있었다. 1862년(철종13년) 5월23일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으려고 진주에서 봉기한 진주민란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감과 동시에 후일 동학혁명으로까지 이어졌다.

진주에서 서쪽으로 남강 상류를 따라 9km쯤 올라가면 수곡면 효자리 중전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의 사기장인 후손들도 진주민란시 봉기하여 진주성으로 쳐들어가 가렴주구를 일삼는 탐관오리들을 응징하였다.

진주민란은 후천개벽을 외치면서 동학을 창도한 최수운으로 하여금 민중에 의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였다. 그는 직접 남원 은적암에서 진주로 와 민중의 노도와 같은 함성을 목격한 후 ‘칼노래’를 작사하였다.

동학혁명 당시 수많은 이름없는 농민군은 칼노래를 부르면서 산화해갔다. 칼노래는 오늘날 최준영이 작사작곡하고 이정현이 불러 우리 사회에 커다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킨 ‘바꿔’처럼 모순의 조선 왕조를 바꿔보려는 큰 뜻이 담겨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중전마을은 조선시대 초기 진주목(晉州牧)에 속하던 도자기를 굽던 자기소(磁器所)였다. 기행자가 진주성을 거쳐 수곡면 중전마을 가마터를 찾아갈 때는 7월의 태양이 작렬하고 있었다.

남강댐 보강공사로 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인근 대평면과 수곡면 일부 지역이 수몰되었다. 여기저기에 신작로와 현대식으로 지은 이주마을이 생겨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요즘은 길이 좋아서 진주시내에서 남강 상류를 따라 서쪽으로 30분쯤 달리니 수곡면 효자리 중전마을이 나왔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아늑한 골짜기는 전형적인 요새처럼 보였다. 이 마을에는 현재 5군데의 가마터가 파괴된 채 남아있다.

여기에서 출토되는 도편을 보면 백자와 분청사기다. 종류를 보면 찻그릇류, 대접 접시, 바래기 등 생활용기들이다. 백자의 태토는 암흙색이고 유약은 조질(粗質)의 백자유를 시유한 것 같으나 흙에 철분이 많이 함유되어 창자빛깔이 나고 유약이 두꺼운 경우는 미세한 빙렬이있다. 3호 가마터에서는 분청사기만을 전문적으로 구웠다.

찻그릇 형태의 도편을 보면 인화문과 국화문 보상화문이 상감되어 있으며 그릇 외부에는 ‘진주장흥고’란 명문이 상감되어 있다. 명문을 보아 이곳이 조선시대 초기 진주목에 속한 자기소로써 많은 양의 그릇을 지방과 중앙에 관납한 것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곳 가마터는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남강 상류에 자리잡은 중전마을 사기 장인의 일생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흐르는 남강의 물소리와 함께 일생을 흙에서 자라 흙만을 만지다가 노년에는 또 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자손 대대로 가업이 강제적으로 세습되기 때문에 사기장인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찻그릇을 만드는 물레소리를 듣고 그 밑에서 흙장난을 하면서 성장을 하였다.

나이가 조금 들면 물레질하는 것도 구경하고 잔심부름도 하면서 끝내는 공동으로 하는 자기소 작업의 한 구성원이 된다. 세월이 흘러 흰수염을 휘날리는 할아버지가 된 노련한 사기장인은 평생을 흙과 불에 관한 체험으로 각자 맡은바 일거리의 화음을 조율하는 위대한 컨닥터였다. 임란시 진주성 공략에 나선 일본인 장수 호소카와(細川)는 남강 나룻배를 이여 중전마을 가마터의 찻그릇을 일본으로 약탈하여 갔던 것이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7/2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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