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이산의 아픔, 유순이 할머니의 망부가

유순이(71) 할머니는 올해부터 남편의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어졌다. 매년 음력 6월23일(양력 7월25일) 20여년간 올려오던 제사였다. 유 할머니에게 제사를 그만두게 한 것은 북에서 온 소식이었다.

7월16일. 헤어져 남편의 생사를 모른지 만 50년에서 9일이 모자라는 날. 북한이 보내온 8·15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에 남편 김중현(69)씨가 포함돼 있었다. 유 할머니는 이 소식을 당국으로부터 직접 받지 못했다. 큰집 조카 영찬(53)씨를 통해서 들었다. “작은 어머니! 작은 아버님이 살아 계시데유.”

유 할머니가 소식을 직접 전해받지 못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남편이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 명단에 자신과 아들 영우(50)씨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청상과부’나 다름없는 아내가 반백년을 수절하고 있으리라고는 남편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헤어질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들을 찾지 않은 건 새삼 말할 필요도 없고.

유 할머니가 내보이는 북측의 통지서 사본에는 몇 차례 복사를 거친 탓에 시꺼멓게 윤곽만 남은 남편의 사진과 함께 남쪽 가족 7명의 이름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김재철(아버지·106), 송씨(어머니·102), 김국현(형·74), 김응현(동생·55), 김정숙(누이·71), 김정임(동생·60), 김의현(4촌·77). “명단에 나와 아들은 쏙 빠졌어요.” 그러려니 하는 유 할머니의 표정에는 서운한 기색이 묻어났다.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이야”

남편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유 할머니는 한편으론 멍해졌고, 또한편으로는 맞선을 앞둔 처녀의 심정이 됐다. 50년간 멈춰있던 기다림의 시계가 다시 째깍거리면서 유 할머니는 마치 최면에 걸린듯 어리둥절해졌다.

“결혼사진은 고사하고 남편이 쓰던 물건도 하나 남은 게 없어요. 6·25 난리통에 모두 잃어버렸지. 사진이라도 있으면 들여다 보기도 하고 아들에게도 보여줬을텐데…. 이젠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렸어요. 첫소식 들었을 때 믿기지 않고 멍멍했어요.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하지만 만나야 한다는 의지와 상봉 날짜에 대한 기다림 역시 강했다.

“명단에는 안들었지만 그래도 가서 만나야지. 처와 자식이 있는데 북쪽에서 오는 양반이 설마 안만나주기야 하겠어. 그런데 남편 얼굴이 아리송한게 알아볼 수 있을지 걱정이야. 워낙 어릴 때 헤어져 시누이도 ‘오빠를 알아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해요.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고, 또 남편이 날 기억할지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어떻게 생겼나 얼른 만나나 봤으면 좋겠어요.”

유 할머니는 남편이 북한에서 새로 결혼해 가정을 이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결혼했어도 이해해요. 나같은 멍청이나 혼자 살지 남자들이 결혼않고 살수 있나요. 내가 재혼했더라도 피장파장이었을텐데 수절하는 바람에 손해봤어. 만나면 뺨이라도 한대 때리고 싶기도 하지만 그럴수야 있나.” 유 할머니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웃음을 지었다.

유 할머니는 남편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보통키에 인물이 삼형제 중 제일 나았다는 것과 얼굴 윤곽이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유 할머니 부부가 헤어진 것은 6·25 발발 한달 뒤인 7월25일(제삿날도 이 때를 잡았다). 충북 청원에서 신방을 꾸민지 6개월만이었다. 피란을 떠났지만 군인들 때문에 길이 막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길가에 즐비한 시체를 넘어 집에 도착한 직후 남편은 이 지역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그길로 마지막이었다.


결혼생활 6개월, 20여년전부터는 제사

6개월간의 결혼생활에 남편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어디 결혼생활이 요즘 젊은이들 같나요. 어른들 눈치가 보여 부부간에도 서로 어려워하며 말도 제대로 못하며 지냈지요. 남편하고 읍내 한번 나가보지 못했지. 읍내라도 가끔 나가봤으면 세상물정을 깨쳤을텐데. 하기야 그 덕분에 지금까지 이렇게 (재혼않고)살아왔는지도 모르지요.”

남편에 대한 기억은 생면부지의 아들과 손자 손녀, 며느리에게는 편린마저 있을리 없다. 유 할머니가 보기에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소식은 ‘그저 좋은 정도’에 불과하다. “(부자간)정은 무슨 정. 얼굴 한번 못보고, 아버지라고 한번 불러보지도 못했는데. 아들은 장가가서 여늬 사람처럼 장인한테 ‘아버님’이라고 부르지를 못하겠더래요. 생전 아버지를 불러보지 못했으니 입에서 나와야 말이지.”

유 할머니가 남편과 헤어졌을 때 임신 3개월째였다. 남편은 물론이고 자신도 임신사실을 몰랐다. 유복자아닌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 영우씨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유 할머니는 “엄마가 마음 아파할까봐 그랬던 것 같아요”라며 아들을 대견해 했다. 손자, 손녀도 할아버지의 생존사실을 알았을 때 덤덤하기만 했다. “자신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제사지낸 사람이라 ‘좋은건지 어떤건지 모르겠다’고 하데요.”

유 할머니에게 남편은 지금까지 월북자가 아니었다. 전쟁통에 죽은 걸로만 알고 있었지 월북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가족도 이런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1983년 남한에서 ‘이산가족찾기’사업이 진행됐을 때 남편을 찾지도 않았다.


남편은 인민군, 시아주버니는 국군

유 할머니 일가는 이산의 아픔 외에도 형제가 적이 돼 싸운 또다른 비극의 주인공이다. 남편이 인민군에 의용군으로 끌려간 반면, 시아주버니는 국군에 징집돼 싸우다 전사했다. 그래서인지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손자들에게는 전쟁이 없어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 할머니가 청원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것은 1977년. 먼저 서울에 정착한 아들집에 오면서다. 서울에 오기 전까지 유 할머니는 ‘과부생활’을 톡톡히 했고 또 고단했다.

시아버지는 ‘행여나’하는 마음에선지 밤이면 며느리가 자고 있는 안방 앞을 둘러보곤 했고, 간혹 친정식구들이 와도 집밖에 나가 배웅하지 못하게 했다. 1973년에는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대소변을 받아내고, 밥숟갈을 떠드리는 생활을 5년이나 했다. 유 할머니의 집안에는 30여년전 청주 향교에서 받은 ‘효부상’상장이 빛바랜 채 걸려있었다.

유 할머니는 6월13일 남북 정상회담 장면을 방송에서 보았다. “TV에서 김정일을 보니까 착잡하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하데요.” 유 할머니는 ‘내 인생을 망친 김일성의 아들’이란 생각과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할텐데’란 생각이 함께 들었다고 한다. “6·25가 여러사람 인생 버려놓았지요.”

50년간 멈춰있던 유 할머니의 시계는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나간 날의 서운함과 얼마남지 않은 재회 날짜에 대한 기대, 또다시 헤어질 날에 대한 안타까움이 유 할머니의 생채기를 다시 건드리고 있다. “만나고 난 뒤에 (남편이)간다면 가는거고, 여기 남는다는 남는거지. 하지만 가지 여기에 남겠어요. 그저 얼굴이나 한번 보는거지.”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7/26 17:15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