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의 저자는 따로 있다?

셰익스피어 저작권 둘러싼 의문 증폭

서구 역사상 천재적 문학성의 백미로 꼽히는 ‘햄릿’과 ‘템페스트’의 저자가 셰익스피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저자가 엘리자베스 시대의 고관대작이자 옥스퍼드의 백작이었다는 정황증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원저자 논란은 1780년대 제임스 윌모트 목사가 원작자를 입증하기 위해 4년간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난 뒤부터 계속됐다.

오늘날 셰익스피어가 원작자라고 믿는 사람 조차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햄릿의 대사 등을 간접적으로 제시할 뿐이다. 하지만 버포드의 백작인 찰스 프란시스 토팹 드 베르 보크럭은 직계 선조인 17세기 옥스퍼드의 백작 에드워드 드 베르(1550~1604)가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가명으로 작품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소설과 동떨어진 셰익스피어 행적

최근 몇년간 많은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저작권 여부에 의문을 표해왔다.

회의론자들은 월트 휘트만을 비롯해 헨리 제임스, 랄프 왈도 에머슨, 마크 트웨인, 지그문트 프로이드, 오슨 웰레스와 최근 연예계의 유명인사인 마크 라일랜스, 글로브 극장의 감독이자 셰익스피어 배우중 최고인 마이클 요크, 케네스 브라나, 데렉 재코비 등이다.

1993년 브라나의 작품에 출연했던 할리우드의 스타 키아누 리브스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원작자 후보에는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벤 존슨, 크리스토퍼 말로우 등 엘리자베스 시대의 작가들도 꼽히고 있지만 무게는 단연 드 베르에게 실리고 있다.

200여년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작품 초안이나 시, 편지, 일기 등 셰익스피어가 직접 쓴 것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변호사가 대신 쓴 셰익스피어의 유언장에도 작품에 대한 언급은 없다.

셰익스피어는 그래머스쿨(문법학교)을 다녔을 뿐이고 스트렛퍼드나 런던 이외에는 여행을 했다는 증거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문학경력이 최고조에 올랐던 40대 후반에 런던을 떠나 시골에서 곡물과 부동산중개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회의론자들은 그런 그가 어떻게 궁중생활과 정치적 역학관계, 그리고 많은 작품의 무대가 됐던 이탈리아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셰익스피어가 사망한지 6년후에 엘리자베스 시대의 최고 걸작 시들을 모은 핸리 피참의 ‘신사 전집’(The Comlpeat Gentleman)이 발간됐는데 이 책의 첫 머리에는 ‘에드워드 드 베르, 옥스퍼드의 백작’이라고 적혀있다.

이후 개정판에도 셰익스피어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셰익스피어가 사망한지 18년만에 스트렛퍼드의 한 교회에 셰익스피어가 곡식꾸러미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다. 100년후에 이 꾸러미는 펜과 종이로 바뀌었다.


드 베르가 원작자일까?

1623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전집인 ‘퍼스트 폴리오’(First Folio)가 출판됐다. 이 전집 서문에는 저자의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한 ‘스트렛퍼드’와 ‘에이번’이라는 말이 나온다.

‘셰익스피어 쿼터리’의 편집자 게일 컨 패스터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공격을 저속한 발상일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시대 그래머스쿨을 과소평가하는 것이고 주장했다.

과연 드 베르가 원작자일까. 17세기 옥스퍼드의 백작은 상당수 작품이 발간되기 전인 1604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지지자들은 작품이 공개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발간연도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석사학위를 두 개나 받았고 3년간 법률공부를 했으며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녔고 궁중생활과 정치에 대해서도 식견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1593년부터 자기 이름으로 출판하는 것을 중단했고 이 해에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초고에 등장한다.

이는 가명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름 중간에 줄을 긋는 것은 당시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가문 문장은 창을 흔드는 사자가 들어있고 궁중에서 그는 ‘창을 흔드는 사람’(spear shaker)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는 그가 실존 인물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빌렸다는 주장도 있다.

필명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작품이 궁중의 음모와 정치적 부패를 다루고 있고 정치인과 고관대작을 풍자하거나 패러디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작가가 한계를 넘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투옥되거나 사지가 잘리기도 했기 때문에 상당수는 익명으로 글을 썼다. 또한 희곡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글로브 극장과 같은 공공극장은 평민이 사는 지역에 있었으며 관객도 창녀나 술주정뱅이 소매치기, 깡패가 대부분이었다.

또다른 이유도 있다. 1623년 ‘퍼스트폴리오’는 드 베르의 양자에게 바쳐졌는데 드 베르는 그와 동성애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도 그의 작품에서 동성애의 흔적을 상당히 발견했다. 당시 동성애는 엄청난 범죄였다.

무엇보다 드 베르가 갖고 있는 제네바 성경책에 대한 8년간의 연구가 1999년 마무리되면서 강력한 증거로 떠오르고 있다. 드 베르는 이 성경책의 1,066개에 이르는 문장에 줄을 쳐놓았는데 이중 4분1 가량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타난다.

정리 송용회 주한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7/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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