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위기] 현대 '벼랑 끝 전술'에 금융 엉망

5개월간의 현대사태를 지켜본 증시의 한 전문가는 ‘역(逆)재귀이론’의 가능성을 우려했다. 조지 소로스가 소개한 재귀이론은 미국식 신경제(New economy)에 맞춰 작년에 유행한 이론이다.

주가는 펀더멘털이 좋아야 상승하지만, 재귀이론은 펀더멘털이 나쁘더라도 유동성의 공급을 통해 주가를 먼저 올려놓으면 펀더멘털은 따라서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1년반 만에 한국 경제가 환란을 극복하면서 국내에서 인기를 끈 재귀이론은, 그러나 지금 역으로 주가가 하락하면서 펀더멘털도 따라 나빠질 수 있다는 논리로 변해버렸다.

이 전문가는 “현대는 역재귀이론의 대표적 케이스로 연구될 수 있다”며 관심을 보였다. 현대는 작년 대규모 유상증자로 부채비율 200%를 맞추며 주가도 올라 재귀이론의 수혜자였다.

그러나 올해는 정반대로 주가가 내리면서 자금공급이 끊기며 자금악화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4개 계열사중 14개가 액면가 이하

지난 주말 현재 거래소에 상장돼 거래되는 현대그룹 계열사 24개 종목 중 액면가(5,000원) 이상인 종목은 10개에 불과했다.

사실상 부도주가인 종목이 14개나 되면서 그룹의 평균주가는 연초보다 42.37%가 하락한 6,907원으로 3만~4만원대인 삼성 LG SK 등 4대 그룹 중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형만한 아우가 없다’지만 기아차를 인수했던 현대차는 시가총액이 2,908억원으로 기아차의 3,213억원에 못미치고 있다.

이로 인해 비록 현대가 영업이익을 내고 있어 대우와는 근본이 다르다는 논리를 비집고, 주가로 보면 작년의 대우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주장이 증시 주변을 떠나지 않고 있다.

사실 대우사태가 터진 작년 7월 증시의 관심은 대우보다는 현대였다. 이미 해외에선 현대도 문제라는 지적을 심심찮게 해오던 터였다. 그러나 ‘현대가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가 이상하게 우려를 말끔히 씻어냈다.

악몽을 떠올리기 싫어한 현대그룹과 정부도 우려 일축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대우와 현대의 차별논리에는 큰 함정이 있다는 게 해가 바뀌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대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고 해결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우사태는 네자리수 증시를 마감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지만 현대는 몸집이나 위상에서 차원이 한수 위였다.

기관이나 전문투자가들은 그전의 대우처럼, 현대에서 돈을 미리 빼내기 시작했지만 개인이 문제를 눈치챘을 때 상황은 너무 늦어버렸다.

대우사태 이후 8개월째 되던 3월말 ‘현대 우려’가 가시권에 들어오자 투자자의 한숨은 지탄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증시가 현대에 코가 꿴 상태는 계속됐다.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일어난지 한 달 뒤인 4월에는 현대투신 사태가 빚어졌다.

5월 말에는 현대건설의 유동성 위기가 장을 뒤흔들며 종합주가를 650선대로 밀고 내려갔다. 외국인과 기관의 기피 속에 가장 많은 현대주식을 보유한 개인투자자의 비난은 어쩌면 당연했다. 현대그룹주를 모두 합한 시가총액은 연초 26.4조원대에서 15조원대로 떨어져 투자자들은 현대에 대한 투자에서 10조원 이상의 손해를 봐야 했다.

작년 두 차례의 유상증자를 실시한 현대건설을 비롯, 현대전자 현대상선 등 주요 기업은 증자 당시의 주가를 웃도는 종목이 거의 없고 엄청난 물량으로 인해 오를 가능성도 희박해졌다.

특히 유동성 위기가 계속되는 현대건설의 주가는 1998년 5월 최저 4,800원에서 작년 7월 1만원대로 올랐지만 지금은 2,735원으로 내려 시쳇말로 ‘똥주’가 됐다. 비록 자금결제 시간을 늦춰가며 ‘마(魔)의 7월29일’을 무사히 넘겼지만 위기를 탈피했다는 신호는 아직 없다.


끊이지않는 ‘현대괴담’

더 큰 문제는 현대사태가 5개월째 원점에서 맴돌면서 증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현대측이 밝힌 후계구도를 둘러싼 경영권 분쟁과, 시장의 신뢰상실에 따른 유동성 위기 대책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장 속이기’였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듯 하는 상황에서 현대는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않아 정부와 줄다리기 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대는 “이 시기만 지나면 유동성 확보가 가능하다”며 금융기관에 자금지원을 요청하면서 태연한 모습이다.

이는 정부가 현대건설을 법정관리나 워크아웃 해주길 바라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다. 정부는 현대가 계열사나 지분을 팔아 사태를 정리하도록 압박을 가하며 계열분리를 유도하고 있지만, 현대는 ‘정부의 정치일정이 맞물리는 시점까지만 버티면 살아날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정부는 “현대에 공적자금을 투여하는 워크아웃 등 어떤 혜택도 고려하지 않는다”며 자체해결토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현대는 그러나 “팔 수 있는게 어느 것인지 알려달라”는, 한마디로 ‘배째라’식의 대응을 해왔다.

이러한 대응은 내년이면 이미 대선정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연말까지만 견뎌내면 정부의 압박카드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사태해결의 양 주체가 신경전을 벌이며 방관하면서 결국 손해는 투자자의 몫이 되고 있다. 시장의 가장 큰 두려움은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건설이 계열분리가 안된 상태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 영향이 현대그룹 전체로 파급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진화를 담당한 정부가 “자금흐름이 잠시 꼬인 미스매칭”이라고 거들고 있지만 증시는 “현대건설로 인해 기업의 자금난이 현실화할 것”이라며 ‘신용경색’이란 화두를 내리지 않고 있다. 증시는 현대건설을 직접 언급하기 꺼려하면서도 워크아웃설, 법정관리설, 사적화의설 등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있고, 주가는 이 설(說)에 흔들리고 있다.

자금시장의 신용경색이 다소 회복되고 주가상승에 대한 기대가 커질만 하면 ‘현대악재’가 다시 불거져 증시를 끌어내리는 일이 반복되자 현대증권의 한 관계자는 “현대사태로 인한 자금시장 악화를 해결하지 않고는 증시에 어떤 전망도 할 수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부채비율 하락은 숫자놀음에 불구”

현대건설의 경우 그동안 외피만 바꿔온 구조조정에 대한 반성도 당연히 뒤따랐다.

현대건설측은 부채비율을 2년만에 690%에서 290%로 낮춰 구조조정에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자본시장의 선입견으로 주가가 반토막 났다는 논리를 폈지만 시장이 주목한 곳은 다른 데 있었다.

동부증권의 김도현 연구원은 “이자부담율은 1997년 9%에서 10%로 늘고, 영업이익률은 줄었는데 자산은 증가했다”며 “결국 부채비율 하락은 증자로 자본금을 5,000억원대에서 9,000억원대로 늘린 숫자놀음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1970년대 중동특수에 힘입어 현대그룹의 기틀을 마련한 건설업종의 대표기업 현대건설이 화려한 과거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증시는 현대가 ‘손가락’을 안자르려고 버티기를 계속하다 ‘손목’이 잘린 수 있다는 우려를 전하고 있다.

비록 칼자루를 쥔 정부가 섣불리 건드릴 처지가 아니지만 현대가 계열분리 및 자산매각 등 자구계획을 조속히 단행하지 않는 한 유동성 위기는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기가 현대에 대한 불신으로 초래된 상황이고 보면 이번에는 손해본 투자자들이 현대에 ‘복수’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태규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0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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