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도 전쟁범죄” 첫 판결

강간을 전쟁범죄로 인정한 판결이 사상 처음 국제사법당국에서 내려져 이를 계기로 전쟁으로 피해를 당한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국제법적 장치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유고전범재판소는 7월21일 네덜란드 헤이그 법정에서 보스니아 전쟁(1992~95년) 당시 강간방조 등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년형이 선고된 전 크로아티아계 헌병 안토 프룬드지야(31)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을 열고 피고측의 항소를 기각, 원심을 확정한다고 판결했다. 유고전범재판소는 2심제이며 이번 항소심 판결에 대한 법리상 논쟁은 더 이상 이뤄지지 않는다.

세계 각 언론은 이번 판결은 국제사법당국이 사상 처음으로 ‘강간을 전쟁범죄’로 인정하는획기적 판례가 될 것이며, 특히 피해자의 증언과 치료기록을 증거로 채택했다는 점과 성폭력의 정의를 확대해석했다는 점에서 향후 유사한 범죄들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한국 등 각국 여성들을 성적 노예로 동원한 ‘군대 위안부’와 관련한 각종 소송들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돼 귀추가 주목된다.


사건 개요와 판결 내용

유고전범재판소 항소심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된 프룬드지야는 보스니아 전쟁 당시 일명 ‘조커스(Jokers)’라 불리운 크로아티아 방위위원회(HVO) 헌병대의 책임자.

프룬드지야는 보스니아 중부 라스바강 계곡의 이슬람계 주민에 대한 ‘인종청소’행위에 가담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부하에게 심문을 위해 감금중이던 이슬람계 여성을 옷을 벗긴 채 흉기로 위협할 것을 지시했으며 부하가 피해여성을 강간하는 것을 방조한 혐의로 1997년 12월 체포돼 다음해 6월 기소됐다.

국제유고전범재판소는 1심 재판에서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피해여성의 증언과 의료기록을 받아들여 프룬드지야에게 ‘전쟁에 관한 국제적 법률및 관행위반’ 혐의(유엔 안보리 결의안 827호 제3조: 강간을 포함한 개인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와 고문)를 적용, 피고를 징역10년을 선고했다.

그는 1심 판결 후 변호인을 통해 피해자가 사망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항소했으나 재판부는“1심 판결에 아무런 법적하자가 없다”며 항소를 기각했다.

피해여성은 상대측의 보복을 두려워해 자신의 신분을 ‘증인A’라고만 밝을 뿐 일체의 신상에 관련된 사안은 공개하지 않았다.


의미와 전망

유고전범재판소가 지닌 국제법상 위상에 비춰 볼때 이번 판결은 상당한 실효적 조치로 이어질 것으로 판단된다.

전범 등 각종 반인륜적 범죄처벌을 목적으로 1998년 로마회의에서 합의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국가간 이해관계의 충돌로 공전되고 있는 현실에서 1993년 설립된 유고전범재판소와 르완다 전범재판소가 각종 전쟁범죄의 국제판례에 있어 사실상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판결이 갖는 법률적 의미는 크게 두가지로 해석된다. 우선 전쟁중이라 할 지라도 성폭행을 명백한 범죄행위로 규정해 이를 처벌할 수 있다는 판례를 남겼다.

또한 자살을 기도할 만큼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의 피해자가 증언한 폭행사실과 의료기록들이 증거로 인정됐다는 점이다. 아울러 유고전범재판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부하의 범죄혐의가 확실할 경우 그 지휘관을 처벌할 수 있다는 대원칙이 이번 재판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사실 ‘강간’은 명백한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국제법상 명확한 처벌조항으로 적용된 사례가 매우 드물다. 2차대전 당시 네덜란드 여성을 군대위안부로 동원한 일본인 장교 11명이 네덜란드의 자체 재판을 통해 강간죄 등이 적용돼 처형되거나 중형을 선고받은 내용을 담은 네덜란드의 공식문서만이 남아있다.

이는 그동안 전범재판이 주로 대량학살에 초점이 맞춰져 왔으며 강간은 ‘반인륜적범죄’라는 다소 포괄적인 개념속에 포함돼 있어 뚜렷한 처벌조항으로서의 적용이 모호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여성의 지위신장에 대한 국제여론이 높아가고 전쟁 성범죄의 심각성이 불거짐에 따라 강간이 독립적인 처벌조항으로 여겨지는게 최근 국제법상 뚜렷한 추세이다.

이번 유고 전범재판소의 판결은 강간죄로 지난 3월 기소된 세르비아계 전범 3명의 재판에도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또 위안부문제와 관련한 각종 국제 소송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각계반응

강간이 주요 전쟁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해 온 국내외 인권단체들은 이번 재판이‘일본의 군대위안부’문제를 포함한 각종 전쟁 성범죄에 대한 철저한 단죄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배금자(裵今子) 변호사는 이번 판결을 크게 환영하며 “일본의 위안부 징집행위를 집단적·조직적 강간 및 강제매춘, 성노예 등으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 및 기업들의 책임있는 사과와 배상을 촉구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위안부출신 할머니 보호시설인 경기 광주 ‘나눔의 집’원장 혜진(慧眞)스님도 “현재 일본에서 진행중인 시모노세키 재판과 2차대전 민간인 전쟁피해자에 대해 배상을 규정한 미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곧 현지에서 시작될 피해배상소송 등에 매우 유리한 판례로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특히 피해자의 증언이 이번 판결에 주요 증거로 채택된 점에 미뤄 다수의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생존해 있고 객관적 자료도 상당수 축적돼 있는 만큼 일본군의 범죄행위에 대한 증거는 충분하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반면 중앙대 제성호(諸成鎬 법학) 교수는 “이번 판결은 개인대 개인간 형사범죄에 관한 판결인 만큼 집단과 국가간 소송인 위안부 문제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지는 차분히 검토해 봐야 할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피력했다.


국제유고전범재판소

국제유고전범재판소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는 1992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와 1993년 5월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설치됐다. 1991년 이후 구 유고연방 내의 민족분규 중 발생한 대량학살과 반인륜범죄에 책임이 있는 개인을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제법정이다.

유엔 국제사법재판소가 있는 국제법 중심지 네덜란드 헤이그의 독립건물에 자리잡은 ICTY에는 모두 75개국에서 파견된 1,000여명이 일하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 인권단체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토대로 검사가 기소를 하면 1심에선 11명의 판사가, 항소심에선 5명의 판사가 심리, 과반수 합의에 따라 선고를 내린다.

위성사진 등 물증과 피해자 증언으로 범죄를 저지른 군 부대가 확정되면 실행범이 특정되지 않아도 지휘자를 처벌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형벌은 신체형인 금고형 뿐이며, 유죄가 확정된 피고인은 ICTY와 수감협력협정을 맺은 유럽 7개국 수감시설로 이송된다.

이주훈 국제부기자

입력시간 2000/08/02 20:27


이주훈 국제부 jun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