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 고법 판결 여전히 '고심'

증거 공방→ 반전 거듭→?

‘사형이냐 무죄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1995년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파기환송심이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대법원의 파기환송에 따라 이 사건을 심리하고 있는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이종찬 부장판사)는 8월말 한차례 공판을 더하고 오는 9, 10월중 선고를 할 예정이다.

재판부로서는 ‘사형 아니면 무죄’라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고 피고인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직접증거가 없는 상황이어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간접증거를 둘러싸고 국내 토종 법의학자들과 외국의 법의학자간 치열한 싸움으로 확산되고 있어 재판부의 판단에 재판당사자 뿐만 아니라 법조계와 법의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판 O.J 심슨 사건

피고인은 외과의사인 이도행(37)씨. 1995년 6월12일 오전 서울 은평구 불광동 이씨의 집에 불이 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서와 경찰은 화장실 욕조 안에서 이씨의 부인 최모(치과의사·당시 30)씨와 한살바기 딸이 목졸려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수사를 벌인 경찰은 3개월뒤 남편 이씨를 범인으로 지목, 살인 등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은 전 미식축구 스타 O.J 심슨의 부인살해 사건과 유사해 ‘한국판 O.J 심슨 사건’으로 불리며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심을 담당한 서울지법 서부지원은 1996년 2월 이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같은해 6월 서울고법은 무죄를 선고하고 이씨를 ‘예비사형수’에서 풀어줬지만 대법원은 1998년 11월13일 이 사건을 유죄취지로 판기환송했다.

이씨는 출감 이후 외국인노동자 의료봉사를 했으나 얼굴이 알려지자 그만두고 친척집과 변호사 사무실 등을 전전하면서 재판부의 판결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 사건의 핵심은 피해자의 사망시간이 언제냐 하는 것이다. 법의학자의 감정이 결정적인데 고려대 황적준 교수와 서울대 이정빈 교수 등 국내 최고의 법의학자들은 이씨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반면 스위스 로잔대학 법의학연구소장 토마스 코롬페처 교수 등 외국의 유명 법의학자들은 정반대의 증언을 하고 있어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사건 당일 이씨가 집을 나선 시간은 오전 7시. 검찰측은 새벽 4시~4시30분에 범행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반면 변호인측은 오전 8시~8시30분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시체의 시강현상(시체가 시간이 지나면서 굳는 정도)과 시반(시체에서 나타나는 반점), 화재양상 등을 검찰과 변호인측이 각각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국내외 법의학자들 정반대 증언

우선 시강현상. 사건 당일 최씨의 시체는 욕조물에 담긴 채 발견됐다. 변호인측은 최씨가 섭씨 40도 안팎의 물에 잠겨 있었고 시체가 굳은 정도를 볼 때 시체를 검안한 오전 10시50분에서 불과 몇시간 전에 범행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변호인측의 의뢰를 받은 독일 함부르크대 법의학연구소 피셀 교수와 에센대 법의학과 클라우스 헨스게 교수 등 3명은 회신을 통해 “사건 당시 사체가 높은 온도의 욕조물에 잠겨 있었다면 시강은 이씨의 출근시점인 오전 7시 이후에 급경히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주어진 모든 자료를 검토한 결과 오전 7시 이후에 모녀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에 대해 검찰측 증인인 서울대 이정빈 교수는 “당시 욕조의 온도와 시체의 직장온도 등을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강만 근거로 사망시간을 추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러나 시반현상을 두고 볼 때 검찰측의 범행추정시간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검안의가 사체를 반대방향으로 돌려놓았을 때 당초 나타난 시반이 사라지고 반대방향으로 이동했다. 이 교수는 이같은 시빈의 완전이동(complete shifting)이 일어나는 것은 사망시간후 약 6~7시간 이내인 오전 4~5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변호인단이 의뢰한 외국의 법의학자들이 시반의 완전이동은 사망한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데 대해 이 교수는 “외국인과 한국인의 시반현상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며 “외국 법의학자들이 이같은 차이를 간과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찰측도 변호인측이 신청한 증인들이 변호인측에 유리한 증언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이유를 들어 중립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화재양상에 대한 공방도 치열하다. 화재가 발견된 시간은 오전 8시40분~9시쯤. 동네주민이 이씨 집에서 연기가 새나오는 것을 보고 바퀴벌레 연무를 뿌린 것으로 오인, 경비실에 알렸고 경비원의 신고를 받은 인근 소방서에서 오전 9시28분 출동한 기록이 남아 있다.

검찰은 의·과학적 지식이 뛰어난 이씨가 수사에 혼선을 초래하기 위해 출근하면서 장롱속 옷가지에 불을 붙여 늦게 번지게 하는 이른바 ‘지연화재’를 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변호인측은 2월24일 현장 상황을 재연해 화재실험을 한 결과 불은 6~8분만에 꺼져 지연화재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측은 이 결과를 재판부에 증거로 제시했지만 검찰측은 변호인단이 주관한 실험에 신뢰성을 두지 않고 있다.


간접증거 인정여부, 형사사건에 큰 영향

이 사건은 직접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법원이 간접증거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느냐는 기준이 생긴다는 점에서 앞으로 형사사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당초 서울고법은 “사망시간 추정과 관련한 각종 증거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며 명백한 증거가 없는 만큼 피고인을 진범으로 단정할 수 없다”며 “법관은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엄격한 증거가 없다면 피고인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고 형사소송법상의 대원칙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간접증거 하나하나의 증명력이 완전하지 않아도 증거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종합적 증명력이 있는 것을 판단되면 유죄를 인정할 수 있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변호인측은 물론 법조계 일각에서는 2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형사사건을 대법원이 유죄취지로 파기환송한 데 대해 의아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은 무엇보다 한국 수사기관의 초동수사상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법의학자가 태부족이어서 사건 현장에 일일이 출동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간접증거의 신뢰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도 법의학자들이 시체를 본격적으로 검안한 것은 무려 23시간이 지난 뒤였다. 황적준 교수는 “시간이 너무 흐른 뒤에 시체를 봤기 때문에 추정시간대가 너무 광범위해 검찰과 변호인의 주장에 모두 부합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증거주의 한계 가늠할 사건

검찰은 1993년에도 사망추정시각 등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와 정황증거만를 기초로 서울 관악경찰서 김기웅 순경(당시 26세)을 살인혐의로 기소했다.

김 순경이 애인 이모(당시 18)양과 여관에 투숙했다가 집안의 결혼반대문제로 다투다 이양을 죽였다는 게 검찰의 주장이었다. 법원도 검찰의 손을 들어줘 1, 2심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1993년 11월 강도혐의로 붙잡힌 서모(당시 19세)군이 강도를 하려고 여관에 들어갔다가 이양이 소리를 지르자 살해했음을 털어놔 검찰과 법원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치과의사 모녀살인사건은 조만간 서울고법의 판결이 나오겠지만 결국 다시 대법원까지 갈 가능성이 높다. 사법부가 간접증거를 어느정도까지 인정하느냐에 따라 증거주의의 한계가 그어질 것으로 보인다.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03 11:50


송용회 주간한국부 songy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