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대한심리연구소장 류한평 박사

"첫눈에 반하는 사랑도 일종의 최면"

대한심리연구소장 류한평(64) 박사는 요즘 소원이 “행여 예약환자 누구라도 펑크 한번 안내주나”다. 의사가운만 안입었다뿐 ‘최면계의 허준’이나 다름없는 그가 은근히 고객이 약속을 어겨주길 바라다니, 그 심리도 보통 심리는 아닌 듯 보인다.

아닌게 아니라 남들이 오해할까봐 어디 가서 드러내놓고 하소연도 못하는 그다. “저도 사람인데, 좀 쉬어야 일을 하지요. 남들이 보면 즐거운 비명이라고 하겠지만 몇십년이 되도록 계속 쉴 틈없이 일만 하다보니 제 자신을 충전할 시간이 이젠 아쉽습니다.”

대한최면심리학회장이기도 한 그의 하루 방문자는 7명 내외. 얼마 안되는 숫자 같지만 1인당 1-2시간씩 소요되는 일이다보니 이 정도로도 하루가 숨차다. 대인·고소·폐쇄 공포증이나 불면증, 비만 등 찾아오는 이유도 각양각색.

특히 환자 대부분이 소위 ‘막차를 탄 사람’이다. 양·한방병원은 물론 심지어 굿판까지 두루 순례하고도 효과를 보지 못하자 류 박사 연구소까지 찾아온 것이다. 여기서도 못 고치면 죽는 수 밖에 없다는 비장파도 적지 않다.

그나마 환자라도 협조적이면 다행이다. 본인 뜻이 아니라 가족에게 억지로 떠밀려 온 경우엔 초면부터 반은 전쟁이다. 싫다는 사람에게 뭘 하자는 것만큼 고역스런 일이 없다. 이런 환자는 반항의 표시로 복수라도 하듯 공격적이다.

치료고 뭐고 다 접어두고 이럴 땐 환자 마음부터 여는 게 급선무다. 이것을 ‘래포’(연대감 형성)라고 한다. 심리학을 전공한데다 30여년간 임상경험으로 별의별 사람을 다 접했던 류박사. 래포에도 어느새 이력이 났다.

“절대 그에게 타이르거나 훈계해서는 안됩니다. 해봐야 쇠귀에 경읽기입니다. 뭣보다 내가 당신편이란걸 보여주고 나를 믿게 해야 합니다. 친근감을 갖게하는 방법은 예를 들면 대화때 그가 앉은 자세, 즉 손이나 다리의 위치나 모양까지 일부러 똑같이 따라합니다.

사소해보이지만 무의식적으로 심리적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질문은 특히 조심합니다. 잔뜩 화가 나 있을 때 ‘왜 화를 내지?’가 아니라 ‘누가 당신을 이렇게 화나게 만들었지?’라는 식으로 묻고, 얘기를 들은 뒤에도 당신을 화나게 한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그를 편안하게 해줍니다.

뭔가 문제를 털어놓을때도 ‘왜 그랬냐?’가 아니라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라고 합니다. 그가 옳든 그르든 그의 편에 서는 겁니다.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면 됩니다.”


최면치료는 전문성을 요하는 엄격한 영역

환자의 동의가 이뤄진 다음에야 최면시술에 들어간다. 최면유도와 최면치료는 별개의 문제. 최면유도는 누구라도 속성으로 배울수 있지만 최면치료는 전문성을 요하는 엄격한 영역이다.

항간의 오해처럼 남의 잠재의식속을 들락거리며 시시콜콜한 비밀을 관찰하거나 공포증을 가진 사람에게 ‘나는 무섭지 않다. 괜찮다’를 단순세뇌시키는것만으로도 만사형통하다면 오죽 좋으랴.

최소한 기원전 928년부터 있어왔다는 그 역사에 비해 최면요법에 대한 연구는 지극히 미미하다. 전통이론으론 해결되지 않는 빈 틈이 지금도 수두룩하다. 류 박사의 경우, 그래서 직접 개발해 낸 기법이 많다. 물론 기존 이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응용기법을 녹여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중 하나가 ‘스크린 기법’이다.

얼마전 심한 대인공포증으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찾아온 A씨에게도 이 방법을 썼다. 최면치료의 첫 단계는 환자의 기억으로부터 문제를 유발시킨 구체적 사건을 찾아내는 것. A씨의 경우 어렸을때 술만 마시면 “너희들 다 죽여버리겠다”며 자신과 어머니를 두들겨 패던 아버지, 집안 세간살이를 뒤엎던 끔찍한 아버지의 기억이 들어있었다. 그 상처가 어찌나 컸던지 정신과 치료로도 극복되지 않는 장애였다.

다음은 최면상태에 들어간 A씨에게 류박사가 건넨 이야기들. “자, 당신은 지금 극장 안에 앉아 있다. 객석엔 당신밖에 없다. 당신 앞엔 큰 스크린이 있다. 곧 어떤 영화가 상영될 것이다. 객석에 앉은 당신 외에도 당신의 분신이 하나 더 있다. 그는 영사실에 앉아 있다.

따라서 영화를 보려고 앉아 있는 당신과 그러한 당신을 또 영사실에서 내려다보는 또하나의 당신이 있는 거다. 드디어 영화가 시작됐다. 바로 당신과 어머니가 맞던 그 광경이다. 단, 이 영화는 흑백필름이다.(중략)… 이젠 필름을 되감아야한다. 리와인드하자면 방금 봤던 장면이 거꾸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도 빨리 움직인다. 2~3초 안에 리와인드를 끝내도록 한다.

동작이 거꾸로 움직이는 장면도 처음부터 끝까지 스크린에서 잘 지켜보라. (비디오의 리와인딩 화면처럼 역상이 나온다. 이것은 사실상 공포의 원인이 된 이미지를 뒤죽박죽으로 흐트러놓아 결과적으로 그 장면 자체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후 같은 방법으로 상영과 리와인드를 5회 반복한다) 이젠 밖으로 나가자. 나가기전에 그 사건을 다시 떠올려보라. 장면이 따라붙는가?(안따라붙는다고 대답하면 치료된 것임)”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총 3분 정도. 의식속에선 좀처럼 떨쳐지지 않던 기억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지워지게 된다. 치료 후에도 재발하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류 박사지만 A씨는 물론 시술후 같은 문제로 다시 찾아오는 환자들은 없다.


어릴적 대인공포증, 대학때 최면에 심취

충북 청양 출신인 그는 일본 경영대 심리학과를 거쳐 미국 브리드 대학, 유니온 대학에서 수학한 심리학 박사. 일본 최면과학원에서 최면지도사 자격도 취득했다.

인간심리나 최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뭣보다 자신의 절박한 필요때문이었다. 어렸을 적 그에게도 ‘대인 공포증’이 있었다. 유난히 무섭고 엄한 아버지 때문에 사람만 보면 겁이 나고 떨렸다. 중학교땐 그 때문에 호흡장애도 겪었고 어느날 전교생 앞에서 구령을 붙여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도 너무 두려워 배가 아프다며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만큼 심각한 중증이었다.

아무리 극복하려 해도 쉽지 않았다. 대학재학중 우연히 뉴스위크지에 실린 최면 기사를 보고 마음이 끌렸다. 호기심보다도 더 발전된 관심이었다. 외국 관련 자료들을 뒤져가며 이론과 기법은 혼자 공부해나갔다.

대학졸업후 한때 한 중앙일간지 기자로도 일했던 그는 1966년 대한심리연구소를 열었다. 당시엔 최면술이 무대용 눈속임 정도로나 치부되던 시절. 한참이나 쓸쓸한 시간을 거쳐야했다.

그러던중 1978년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정효주양 유괴납치 사건은 그가 뭘 하는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사건 발생 33일이 넘도록 사건이 오리무중에 빠진 부산시경팀이 류 박사를 초빙, 납치현장을 목격한 9세 어린이의 최면을 통해 범행차량의 번호와 시트종류, 유리문형, 차종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 사건해결의 결정적인 실마리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최면수사라는 용어도 이때 국내에 본격등장했다. 그외에도 이윤상군 피살사건, 서대문세무서 부가가치세 환납금 통지서 절취사건, 작가 김홍신씨 자택 강도사건 등 많은 사건일지 속에 그의 이름이 함께 들어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무부, 경찰청 등으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여러번. 바로 며칠 전만 해도 한 교통사고 피해자 가족이 도움을 청할 만큼 지금까지도 최면수사에선 오랜 단골 주역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때엔 육영수 여사로부터 청와대에도 초청받았던 적이 있다. 박 대통령의 불면증과 아들 박지만씨의 마음을 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 주치의의 거부로 무산됐고, 지만씨는 지만씨대로 최면술이 무섭다며 도망가버려 이뤄지지 못했다.


사회 전반에 최면요법 이용돼

최면요법이 제법 알려진 요즘은 숨은 전문가도 많다. 생활 도처에 최면이 이용되고 있다. “가령 보험세일즈맨만 해도 대단한 최면유도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세일즈하는 과정이 거의 최면유도원리 그대로입니다.

우선 보험상품을 소개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놓게 만든 뒤 일단 자기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턴 틈을 주지 않습니다. ‘이건 당신 자녀를 위한 거다. 더 생각하고 말 필요도 없다. 당장 계약서에 도장을 찍자.’ 상대가 미처 고민할 틈도 없이 여세를 몰아부칩니다.

결국 얼떨결에 상대방은 도장을 찍고 계약을 하죠. 이런게 바로 의식협착 상태인데 이것은 뇌의 인지범위가 갑자기 극소화되면서 자기 판단력, 분석력이 완전히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이성적 판단이 전혀 불가능해지죠.

이럴 땐 누가 뭐라고 해도 아무 저항없이 무조건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다 세일즈맨이 떠난 뒤에야 정신이 퍼뜩 들면서 ‘아, 내가 왜 그렇게 쉽게 계약을 해버렸을까’라고 후회가 되는, 바로 그런 최면입니다.”

진짜 겁나는 ‘선무당’은 따로 있다. 천존회 사건 등 최근 심심찮게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사이비 종교문제는 최면이 종교의 가면 아래 악용된 경우다. 특히 얼토당토않은 행각에 의사나 변호사 등 인텔리까지 휘말릴 수 있는 이유도 그것이 이성적 판단력이 마비된 최면상태이기 때문.

교주 특유의 어조나 눈빛, 집단적 광기 등 갖가지 장치를 통해 일단 최면상태에 들어가면 의식협착 상황 하에 세뇌못할 일이 없다. 최면은 그만큼 위험한, 예리한 칼의 양날을 갖고 있다.


최면은 말로 설명이 안되는 요법

“반면에 설명이 안되는 것도 몇가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사랑입니다. 특히 한눈에 반했다는 사람들 있죠, 그 짧은 찰나에 어떻게 슬쩍 쳐다보기만 하고도 순식간에 불꽃이 튀는지, 사랑도 일종의 최면임엔 틀림없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더이상은 설명이 안됩니다. 조물주가 원래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있어야지요.”

그간 약 20권의 책을 펴낸 류 박사. 1960년대 파릇한 청년으로 들어섰던 종로통 사무실을 환갑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몇십년이 되도록 전화번호도 그대로다. 옮기고 싶어도 이젠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기 싫어 눌러앉아 있다.

요즘 그가 부쩍 ‘나도 좀 쉬고 싶다’는 건 사실 다른 욕심이 있어서다. 나이가 들자 책 읽는 재미가 부쩍 더 커졌다. 시간만 나면 좀더 독서량을 늘려보는 게 바램이다. 틈틈이 익힌 컴퓨터 실력으로 머지않아 최면 관련 인터넷방송 시작할 예정이다.

세월이 바뀌긴 확실히 바뀌었다. 전북 익산의 원광대에선 빠르면 올 9월부터 최면학 강의를 해달라고 손짓중이다.

그러마고 대답은 해놓았지만 지나고보니 새삼 갈등이다. 안그래도 시간이 빠듯한 판에 매주마다 지방 출장까지 다닐 생각을 하니 지금이라도 거절할까, 마음이 오락가락이다. 최면전문가 류 박사도 별수 없었을까. 그 제의를 받았을 때 그도 의식협착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0/08/03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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