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20)] 사천(下)

곤양 다솔사와 자포실 가마터

사천에서 남해고속도로를 따라 하동쪽으로 20분쯤 달리다보면 오광대(五廣大)로 유명한 가산을 거치면서 곤양 인터체인지가 나온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 면소재지로 전락해버렸지만 조선시대에는 당당한 군(君)소재지였다.

곤양면에는 오랜 역사 유적지가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임진왜란 당시 이 충무공이 모함을 받고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물러난 후 다시 임명장을 받을 때까지 백의종군하면서 사천과 남해안 일대 일본군을 격파하기 위한 전략을

짜던 유적지가 남아 있다.

또한 한국 명차의 고향이며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의 산실이기도 한 곤양 다솔사가 북쪽에 우뚝 자리하고 있다. 다솔사는 신라 지증왕 4년 인도의 스님 연기조사가 창건해 영악사로 불렀다.

그후 춘풍추우를 겪으면서 임란때 크게 병화를 당했고 20세기까지 법등(法燈)을 간신히 이어오다가 명실공히 한국의 차절(茶寺)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은 효당 최범술(曉堂 崔凡述 1904∼1979) 때부터였다.

한국 현대 불교계와 차문화계에 효당이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효당은 일제 하에 민족정신으로 다솔사를 지키면서 독립운동의 산실을 만들었다. 그때 효당을 중심으로 다솔사에는 한용운 김범부 김범린 변영만 변영노 변영태 박영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지성인이 모였다.

M효당은 이 지역에서 자생하고 있는 야생차 씨앗으로 다솔사 후원에 훌륭한 다원(茶園)을 조성하여 손수 ‘반야로’란 명차를 제다(製茶)하여 차문화 보급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가고 없지만 효당이 조성한 다원은 싱그럽게 기행자를 맞이해 주고 있다. 황금측백나무 오솔길을 뒤로하고 하산하다보면 잠시나마 세속의 번뇌망상에서 해탈을 하게 된다. 다시 발길을 곤양 면소재지로 돌리면 골목 한켠에 주인 잃은 고가(古家)가 나온다.

추사체의 대가로서 곤양의 정신을 지킨 도연 김정(陶然 金正)의 서실(書室)이다. 작년 귀천할 때까지 붓을 잡은 그는 분명히 천수를 누리면서 학처럼 살다갔다.

곤양 향교에서 북쪽으로 4km쯤 올라가면 송전리가 나온다. 다시 이곳에서 큰 저수지를 지나 산쪽으로 올라가면 옛 마을 이름인 자포실(蒲谷)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모두 주택개량을 하여 주거환경이 쾌적해 보인다.

마을 끝 주택 뒷편 대숲 아래에는 15세기 중엽의 분청사기 초벌구이 도편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다시 계곡의 오솔길을 따라 깊숙히 20m쯤 가면 칡넝쿨 더미 속에 분청사기 사발 도편을 발견할 수 있다. 출토되는 도편은 인화문, 국화문 등이며 사발은 대나무굽 형태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발견된 도편중에는 ‘곤남장흥고’란 명문이 상감된 것이 있어 분청사기 편년과 이곳 가마터 상한년대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일제때 경성제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조선시대 대외교섭사가 전공이던 오쿠히라 다케히코가 소장한 ‘곤남장흥고’란 명문이 상감된 접시도 바로 이곳 가마터에서 제작된 것이다.

곤양지역에는 예로부터 도자기 제작의 원료가 되는 도토가 많이 매장된 곳이다. 경국대전 공전외공장 경상도조에 의하면 곤양군에 사기장 2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복중(伏中)의 가마터 답사는 무척 힘이 든다.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리고 우거진 수풀 사이로 사금파리 조각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석양무렵 곤양성내 허름한 주막에서 맥주 일배로 해갈하였다. 같이 동행한 석각예술가 우석형과 함께 석양배를 마시면서 주모가 흥얼거리는 곤양남봉가 한 곡조에 고단한 답사기행의 하루를 달래본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8/08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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