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휠체어 투혼 처절한 2, 3국 연승

‘조선생은 앉을 수 없지만 나는 의자대국도 상관없습니다.’

고바야시의 이 말로 대망의 기성전 도전기는 실현되었다. 고바야시의 냉철한 일성은 승부사로서는 지극히 진실된 마음이었으나 한국팬의 입장에서는 타도의 대상이 될 만큼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조치훈의 대국강행 의지와 고바야시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서 대망의 기성전은 막을 올린다. 단, 도중에 의사가 중단을 요구하면 즉석에서 대국을 중지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조치훈은 기성으로서 약속을 지킨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조치훈은 휠체어에 목발, 왼손은 깁스, 그리고 하오리 하까마를 입었다. 대국전날 형인 조상연과 부인을 대동한 채 요미우리 특별기편으로 대국장인 도야마로 날아온 조치훈이다.

제1국은 2집반패. 당연한 패배이리라 짐작은 했지만 조치훈의 정신력은 가히 불꽃 그 자체였다. 바둑 속에 조치훈 다움은 있을 수 없었다. 그냥 줄줄이 밀려버린 평범한 범전. 단지 두고싶다는 일념, 고바야시와 마주 앉고 싶다는 일념으로 지탱되는 듯했다. 조치훈의 즐거움은 부인 쿄코의 당시 언급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제1국은 사실 기권하고 싶었습니다. 주치의도 둘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1국을 끝낸뒤 갑자기 원기왕성해진 걸 보면 이 사람(조치훈)은 확실히 바둑을 두기 위해 태어났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언제든지 두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치훈의 회복은 의사의 판단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사실 5국 이후는 휠체어로 이동은 했으나 대국은 보통때처럼 책상다리로 했으니 체력저하만 아니라면 겉으로는 정상적인 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그 역시 정신력의 소산이 아니었을까.

제1국이 개막되기 전 요미우리 신문에 고바야시가 조치훈을 병문안하는 사진이 실렸다. 전신을 붕대로 감은 만신창이 조치훈이 빙그레 고바야시에게 웃음을 띠면서 맞이하는 사진이었다.

한국팬이 고바야시를 철저히 미워하는 대신 조치훈은 정말로 그를 좋아하게 된다. 조치훈은 대국당시에도 그런 인터뷰를 하지만, 고바야시가 정당하게 만나주지 않았더라면 조치훈은 더욱 괴로웠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피해자는 고바야시입니다. 이런 부상자를 앞에 두고 상대한다는 건 괴로운 일일 겁니다. 섣부른 동정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바둑판을 대하면서 제대로 두어주었습니다. 그것에 감사드립니다. 내가 고바야시의 입장이라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겁니다. 고바야시에게 상당한 친밀감을 느낍니다. 고바야시의 정당한 태도에서 진정한 강함과 훌륭함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2국은 조치훈이 백을 들고 완승을 가둔다. 그리고 내친 김에 제3국에서도 흑을 들고 집념의 승리를 거둔다. 이로써 기성전 도전기는 졸지에 휠체어에 앉아 불편한 몸으로 바둑알을 잡은 조치훈이 2:1로 앞서가게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한국팬은 광복을 맞은 마음으로 기꺼이 환호했으며 조치훈의 인간승리에 경하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일본팬은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과연 인간 조치훈이 이토록 강하다는 것인가.

교통사고가 아니라도 조치훈은 슬럼프였고, 고바야시는 가파른 상승세였으므로 고바야시의 우세가 다수의 의견인데 어찌 성하지 않은 몸으로 이런 괴력을발휘할 수 있다는 것인가.

조치훈의 작전은 아니었지만 고바야시는 오히려 부담을 갖고 있던 터였다. 이긴다면 부상자를 상대로 이겼다는 부담이 남고 진다면 부상자에게 졌다는 비난이 돌아올 것이다. 고바야시는 조치훈의 말대로 피해자인 것이다. 고바야시는 삭발한다. <계속>


<뉴스와 화제>


ㆍ조훈현, 후지쓰배 결승진출

조훈현이 다시 한번 세계정상정복에 나선다. 12일 일본에서 속개되는 제13회 후지쓰배 결승에 진출한 조훈현은 중국의 일인자 창하오와 결승서 단판승부로 최강을 가린다. 조훈현은 후지쓰배에서 1995년 우승을 차지한 바 있으며 창하오는 98년 이창호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문 것이 최고의 성적이다.

ㆍ이창호 패왕전 6연승 이룰까

‘기록제조기’ 이창호가 또하나의 금자탑에 도전한다. 단일기전 최다연승기록이 바로 그것. 현재 이창호는 패왕전 본선연승전에서 본선개막 이후 줄곧 승리를 거두어 6연승을 달리고 있는데 19명의 본선멤버를 모조리 물리치고 희대의 연승기록인 19연승을 기록할 지가 바둑가의 관심이다.

이창호 스스로도 욕심을 숨기지 않고 있는데, 연승전 형식의 패왕전에서 이창호가 19연승을 기록할 경우 곧장 타이틀 보유자가 되는 영광도 함께 누리게 된다.

[바로 잡습니다] 지난호(1833호 8월10일자) 기사 중 ‘기성전 제1국을 조치훈이 기권했다’는 부분은 사실이 아니므로 바로 잡습니다. 필자의 착오로 생긴 잘못이었습니다.

<진재호 바둑평론가 >

입력시간 2000/08/0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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