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하면 사면 '우리나라 좋은나라?

정치인 복권까지… 힘있는 사람만 항상 혜택

“힘있는 사람들은 정말 살기 좋은 나라야.”

정부가 8·15 광복절을 맞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와 선거법위반 정치인 등을 사면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에 대한 불만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보도가 나온 이후 정치인 등 사회 고위층 인사에 대한 사면남발을 비난하는 글이 50건이 넘게 게재됐다. 시민단체들은 물론 법조계와 학계 등에서도 “또 사면이냐”며 흥분하고 있다.

경실련 이석연 사무총장은 “권력형 비리자와 선거법위반 사범에 대한 사면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며 “사면대상자가 확정되면 시민단체들과 연대해 사면권 남발을 막을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법조계 등 전문가그룹은 물론 대다수 국민은 더 이상 흥분할 기력도 없다는 허탈감에 사로잡힌 분위기다. 지난해 광복절 특사를 통해 김현철씨에 대한 잔형면제조치가 내려지자 위험수위에 육박할 정도로 여론이 악화했지만 1년만에 다시 김씨를 복권시키기로 하자 정부의 뚝심에 질렸다는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한 독자는 한국일보에 전화를 걸어 “높은 사람들 다 풀어주는 사면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정부가 끈질기게 풀어주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국민 대화합이라고 그러는데 그게 과연 국민을 화합시킬지 아니면 국민분열을 조장할지 누가 알겠느냐”고 물었다.

지금까지 여권 핵심부가 언론에 흘리는 내용을 종합하면 이번 특사에는 15대 국회의원 임기중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민주당의 이기문, 한나라당의 이명박 최욱철 이신행 홍준표, 자민련의 조종석 김화남 전의원과 15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장외집회 과정에서 선거법위반으로 600만원의 벌금형을 받고 피선거권이 박탈된 박계동 전의원 등 8명이 포함된 것은 확실하다. 한보 및 청구사건으로 구속된 홍인길 전의원도 사면혜택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선거법 위반 정치인 대거 혜택

청와대와 여권핵심부가 가장 고심하는 것은 김현철씨에 대한 처리. 청와대와 여권핵심부는 여론의 반응을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현재 분위기로는 어느 정도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김씨 문제를 확실히 매듭짓겠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 정부에 대해 시도 때도 없이 독설을 퍼붓는 김영삼 전대통령을 달래기 위해서는 김씨의 복권밖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반응처럼 권력형 비리와 선거법을 위반한 거물들에 대한 사면이 현 정권의 지지기반 강화에 얼마나 도움을 줄 지에 회의를 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정치개혁시민연대 김석수 사무처장은 “국민이 전혀 동의하지 않는 사면을 남발하면 장기적으로 현정부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사면권은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제도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전제 봉건시대의 잔재인 사면권이 3권분립과 법치주의의 원칙을 뿌리부터 뒤흔든다는 지적과 유권자의 거부감 때문에 극히 신중하게 이뤄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클린턴 대통령이 푸에토리코 테러범 12명을 사면했다가 의회가 사면권 남용이라며 진상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8년간 집권하면서 3,000여건의 사면청원을 접수했지만 단 3건에 대해서만 사면권을 행사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이 사임한 뒤 후임으로 임명된 포드 대통령은 닉슨을 사면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유죄판결이 확실한 닉슨에 대한 사면을 결정하자 백악관 대변인이 항의성 사표를 제출했고 법원은 “국가를 망칠뻔한 사람이 사면된다면 다른 피고인을 구속할 이유가 없다”며 구속된 관련자들을 대거 석방해버렸다.


"남용땐 대화합 아닌 국민분열"

미국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사면은 지나치게 남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정략적으로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법무부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국회에 지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수립 이후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는 특별사면과 감형 복권건수는 모두 90차례에 이르고 있다.

김영삼 전대통령이 5년 재임기간중 매년 네차례 꼴인 19회의 특별사면 감형 복권을 단행해 4만3,805명에게 혜택을 줘 1등을 차지했다.

그 다음이 박정희 전대통령으로 18년 집권기간 18차례(2만2,732명), 전두환 전대통령이 7년 집권기간중 한해 2.5회꼴인 18차례(1만2,364명)로 공동 2위에 올랐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13년간 15차례(2만58명), 윤보선 전대통령은 5년 재임기간중 7차례(4만8,197명), 노태우 전대통령은 5년 재임기간중 7차례(9,643명) 사면권을 행사했다.

김대중 대통령도 1998년 2월 취임이후 지금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특별사면과 가석방, 가출소, 건설업체에 대한 제재해제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번 광복절 특사까지 합치면 6개월에 한번꼴로 사면권을 행사하는 셈이다. 1998년 3월13일 취임경축 대사면때는 사상 최대규모인 5백52만7,327명이 혜택을 받았다.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 전과자가 양산됐다는 불가피론도 있지만 정작 문제는 국민 대화합과 생계형 범죄자 구제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권력형 비리자와 선거사범들을 함께 풀어준다는 점이다.


DJ, 6개월에 한번꼴 사면

중앙선관위가 16대 총선 입후보자의 전과기록을 조사한 결과 전체 274건중 57%인 156건이 형기를 채운 것이 아니라 사면과 복권으로 형이 실효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시국사범을 제외한 특별사면 복권자의 절반 이상이 뇌물수수 등 공직비리와 선거법위반으로 처벌받은 정치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역대 정권들이 집권초기 서슬퍼런 사정의 칼날을 휘두르다가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사면복권해주는 일을 반복하면서 표적사정 시비를 자초하고 법치주의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실정이다.

김영삼 정부는 성역없는 사정을 기치로 각종 비리사건을 수사해 6공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의원과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 엄삼탁 전 병무청장 등을 구속했지만 모두 사면복권조치로 현재 자민련과 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들어서도 이같은 관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2·12 5·18사건과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처벌된 14명을 복권했고 한보비리 관련 정치인들도 모두 원상회복시켜주었다.

권노갑 전의원은 지난해 광복절 때 사면복권되자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일본에 6개월 가량 머문뒤 올해 초 귀국, 민주당 고문으로 화려하게 복귀해 현재 여권의 실세로 활동하고 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정치권의 심한 압력을 견뎌내면서 겨우 정치인들을 기소해 유죄판결까지 받아내도 조금 있으면 풀려나 정치권에 복귀하기 때문에 아무리 파렴치한 정치인이라도 정치인 수사는 꺼릴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주덕 변호사는 “선거법 위반이나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들을 사면하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하더라도 복권까지 시켜주는 것은 문제”라며 “법치주의의 틀을 흔들고 있는 현행 사면관행은 강한 국민적 저항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용회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10 12:44


송용회 주간한국부 songy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