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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전경련

침몰하는 전경련

재계대표위상 간데없고 무기력한 모습만

재계의 입 노릇을 해온 유한수 전무가 전경련을 떠났다. 9월부터 사이버 금융회사 피놋닷컴(www.P-Note.com)의 부설연구기관인 디지털금융연구원 원장으로 옮긴다.

그런데 그는 요즘 어깨가 축 쳐져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전경련 걱정을 늘어놓는다. 그의 말 뒤엔 한숨소리가 짙게 배있다.

특유의 달변과 철저한 논리 무장으로 전경련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그였다. “더이상 초라해지기 전에 전경련을 떠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습니다. 솔직히 보람은 커녕 일할 의욕도 없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유 전무를 좌절감에 빠지게 한 걸까. 유 전무의 결단은 전경련의 위상변화와 결코 무관치 않다. 요즘 들어 전경련의 무기력함을 지적하는 재계 인사들이 부쩍 늘었다. 어떤 이는 심지어 “더이상 전경련은 없다”고까지 말한다. 재벌정책을 놓고 정부와 치열한 한판승부를 벌였던, 불과 2~3년 전의 상황과는 전혀 딴판이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국세청을 내세운 정부의 전방위 재벌 압박 작전에도 불구하고 전경련은 짐짓 뒷짐만 지고 있다.

최근 법무부가 내놓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안에 대해서도 ‘수용불가’ 입장을 표명했지만 예전의 중량감은 느낄 수 없다.

이 와중에 전경련을 떠나는 직원의 ‘이탈 도미노’는 심각한 상황이다. 전경련 수뇌부의 지도력 부재를 지적하는 분위기도 팽배하다. 전경련이 총체적 위기상황을 맞고 있는 것이다.


전경련의 이탈 도미노

재계의 본산인 전경련이 직원들의 잇따른 이탈로 홍역을 앓고 있다. 전경련 인사팀 관계자는 “벤처 열풍을 타고 올 들어 전경련을 나간 임직원만 20여명에 달한다”며 “한창 일할 전문 직원의 이탈현상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전경련 사무국 전체 직원이 120여명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이후 벤처 열풍을 타고 팀장급 이상 40여명 임직원 가운데 30% 이상이 물갈이됐다는 게 전경련의 설명이다. 자유시장경제의 전도사역을 자임했던 공병호 전 자유기업센터 소장에 이어 유 전무도 짐 보따리를 챙기고 있다.

전경련의 한 중역과 팀장급 중간 간부를 비롯한 3명의 브레인도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곧 자리를 뜰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남아있는 직원도 허탈한 무기력증에 빠진 것은 마찬가지다.

전경련의 한 직원은 “주위에 사람들이 한둘씩 자리를 뜰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일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며 “오히려 떠나는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다”고 토로했다.

이같은 요인은 정부의 재벌개혁과 무관치 않다. ‘재벌 오너 패밀리 모임’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전경련이 정부의 개혁정책 구도와 맞아떨어질 리 없기 때문이다.

유 전무의 이탈이 그 대표적 사례다. 유 전무는 각종 방송 출연이나 신문기고를 통해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을 비판했다가 정부의 강력한 ‘견제’에 시달렸다. 그는 “방송이 끝난 뒤 모처에서 ‘한번 해보자는 것이냐’며 노골적인 외압을 받았다”고 정부의 외압 실체를 인정했다.

전경련의 다른 직원은 “정부가 전경련이 낸 정부 비판 보고서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면서 전반적인 연구·조사활동이 위축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내부 불화설도 직원의 사기저하에 한몫을 하고 있다. 정부의 개혁 정책에 대한 대응 수위를 놓고 수뇌부와 일선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왕따’당하는 전경련

1960년대 경제개발시대 이후 전경련은 재벌을 대표하는 경제단체로 그 위상이 대단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 회장과 고 최종현 SK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비롯한 성장신화의 주역들이 전경련 수장으로 있을 당시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삼성 이건희, LG 구본무, 현대 정몽구·몽헌 회장을 비롯한 4대 그룹 회장이 회장단 회의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이미 오랜 전의 일이다. 4대 그룹은 오히려 노골적으로 전경련에 딴지를 걸고 있다.

4대 그룹과 전경련 사이가 소원해진 것은 정부의 재벌개혁이 직접적 원인이다. 재계는 내심 정부의 전방위 압박에 대해 전경련이 바람막이 역할을 해줬으면 하지만 실제 평가는 ‘낙제점’ 이다.

4대 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관계자는 “이미 전경련이 존재 의미를 상실한 상태”라며 “전경련에 대한 기대를 버린지 오래”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4대그룹의 다른 관계자는 “정부에서 재벌 총수의 사재출연이나 전문 경영인 퇴진을 비롯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마당에 전경련은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4대 그룹의 이같은 분위기는 김각중 회장 취임 이후 더욱 노골화됐다. 김 회장에 대한 재계의 평가는 대체로 합리적이고 무난하다는 평이 주류다.

반면 추진력이나 리더쉽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요즘과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는 리더의 신중함 보다는 강력한 추진력이 더 절실하다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그동안 전경련 회장이 주로 4대 그룹 오너 출신이었던 반면 김 회장은 그렇지 못하다는 ‘중량감’ 부족도 전경련의 위상 변화에 한몫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전경련의 살 길은

전경련의 위상이 한없이 곤두박질 치면서 대한상의가 재계의 맏형을 자처하고 있다. 재계는 물론 전경련 내부에서도 전경련의 환골탈태를 외치는 목소리가 크다. 재계 일부에서는 경제단체 통·폐합론까지 거론되는 분위기다.

4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최근 일본 경제단체의 통합 움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며 “상의와 전경련의 중복된 기능을 통합한 뒤 명실상부한 재계 대표단체로 거듭 태어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계는 내년 2월로 예정된 신임 전경련 회장 선출이 전경련 위상 변화의 주된 고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전경련 유한수 전무는 “현 집행부로는 전경련 개혁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며 “강력한 리더십을 갖춘 중량급 인사를 영입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칫 재계에서 회장단을 계속 고사하면서 낙하산 인사가 올 수도 있다”면서 “이 경우 전경련은 더이상 존재 이유가 없다”고 잘라말했다.

박문규 경향신문 경제1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17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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