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 부시(武士)①

일본은 오랫동안 무인이 지배한 나라라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일본의 무인 통치는 가마쿠라(鎌倉)에 군사통치 기구인 바쿠후(幕府)가 처음 설치된 1192년부터 1867년의 메이지(明治)유신에 이르기까지 675년간에 걸쳤다.

한국이나 중국도 왕조 교체기에는 무인의 영향력이 두드러졌으나 새 왕조가 수립되면 이내 문인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가마쿠라 바쿠후의 수립과 비슷한 시기인 1170년에 고려에 무인 정권이 탄생, 100년을 지속했고 몽골 침입이라는 외적 충격만 아니었다면 더욱 오래 지속됐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러나 무인 중심의 문무합작 정권으로 출범한 조선이 곧 문인 지배로 이행한 데서 보듯 고려의 무인정권은 예외에 지나지 않았다.

고유어인 ‘모노노후’(物部)나 한자어인 ‘무샤’(武者) 등으로도 불린 일본의 ‘부시’(武士)는 10~11세기 농촌을 무대로 성장했다. 율령제의 혼란에 따른 사적 토지 소유의 확산이 주된 배경이었으며 전투력 확보를 위한 병제 개혁도 한 요인이었다.

701년의 다이호(大寶) 율령의 반포로 본격화한 일본의 율령제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신분제도와 양민의 조세·역(役) 부담을 토대로 했다.

이를 기반으로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려는 시도가 잇따랐으나 호족들의 저항으로 극히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천황의 통치권은 확보되지 못했다. 또 통치권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 도호쿠(東北) 지방에서는 ‘에미시’(蝦夷)족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792년에 시행된 곤데이(健兒) 제도는 반란 진압을 위한 효율적인 전투조직의 확보가 목적이었다. 지방의 호족이나 유력자의 자제를 ‘곤데이’로 지정, 말타기와 활쏘기, 검술 등의 연마에 전념하게 하고 조세와 역의 반감 등 혜택을 주었다.

전국적으로 3,000~4,000명에 이른 곤데이는 징집된 농민을 1,000명씩 군단으로 묶었던 그때까지의 군대에 비해 월등한 전투력을 과시했다. 신라의 화랑과도 비슷했던 곤데이 제도에 따라 지방 유력자들은 전문적 무예를 익힐 기회를 얻었다.

나중에 토지제도의 혼란을 틈타 대규모 토지를 갖게 된 지방 유력자들이 무사계급을 형성해 가는 계기이기도 했다.

지방 유력자들은 스스로 토지를 지키기 위해 무예 연마에 열을 올리는 한편 중앙 권문세가에 토지를 기증하고 그 관리자가 되기도 했다. 무예를 닦은 이 지방 유력자들은 ‘쓰와모노’(兵)로 불렸고 이들이 바로 무사의 원형이었다.

이들은 이미 10세기에 이르면 중앙 호족의 지원을 얻어 일정 지역의 치안과 군사를 담당하는 지방 군사 귀족으로 성장했다. 쓰와모노는 처음 농민을 하급 전투 종사원으로 이끌었을 뿐 다른 쓰와모노를 거느리지는 못했다.

11세기 들어 토지를 매개로 한, 다른 쓰와모노와의 주종관계가 본격화하면서 중층 계급구조를 띤 무사단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더욱이 무사단의 경쟁과 통합의 결과 12세기 말에는 전국적 규모의 대규모 무사단이 형성됐고 구성원들은 전국 각지에 계급에 따른 영지를 확보했다.

가마쿠라 바쿠후의 설립으로 무사의 영지 지배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동시에 ‘지샤’(寺社·절과 신사), ‘구게’(公家·천황 중심의 조정) 등과의 관계 속에서 무력을 담당하는 직능 집단에 머물렀던 무사 계급은 무력과 정치력을 동시에 장악한 중심 세력으로 탈바꿈했다.

무사는 바쿠후의 최고 통치자인 ‘쇼군’(將軍)을 정점으로 한 다단계 계급 구조에 속해 있었다. 대체로 오늘날 현에 해당하는 ‘구니’(國)의 영주 ‘다이묘’(大名)는 쇼군을 주군으로 섬겼다.

대신 다이묘는 가신단에 속한 무사는 물론 구니 안에 영지를 가진 중소 영주인 ‘고쿠슈’(國衆)의 주군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무사는 ‘이에’(家·가문)를 중심으로 혈연집단의 강한 횡적 연대를 이루었다. 무예를 가업으로 삼는 각급 무사의 이에, 즉 ‘부케’(武家)는 대대로 그 지위를 이었다. 물적 기초인 영지와 인력이 함께 세습된 것도 물론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사 사회의 종적 질서는 흐려져갔다. 특히 쇼군 계승권을 둘러싼 1467~1477년의 ‘오닌(應仁)의 난’을 계기로 하극상이 꼬리를 물었다.

몇 개의 구니를 영지로 가진 ‘슈고다이묘’(守護大名)에서부터 말단 영주인 ‘구니슈’(國衆)에 이르기까지 앞 다투어 지배 권력을 부정하고 힘으로 권력과 영지를 넓히려는 전쟁에 나섰다. 이 센고쿠(戰國) 시대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그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을 통일할 때까지 약 100년간 계속됐다. <계속>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08/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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