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21)] 하동(上)

부활하는 일본 국보 이토 찻그릇의 고향

인간은 부자와 빈자를 떠나 누구에게나 휴가를 즐길 자유가 있다. 그래서 혹서를 피해 해외로 나가는 인파로 공항은 북새통을 이룬다. 미처 해외로 나가지 못한 사람은 전국의 산과 바다로 떠나기 위해 고속도로는 주차장을 연상하게 하고 있다.

요며칠 지리산 일대와 남해안에는 국지성(局地性) 폭우가 내려 인근 주민과 피서객을 긴장시켰다. 남해안 어민은 멸치가 잡히지 않아 커다란 시름에 잠겨있다.

그런데 엊그제 내린 폭우와 함께 지리산의 피서객들이 버린 쓰레기 수만톤이 남해 멸치어장을 덮쳐 난장판을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남해군 율도 멸치어장 주인 김대성씨는 “천지만물은 모두가 한몸인데 제발 우리 인간은 이제 이기심과 탐욕에서 벗어나 인간, 지구, 우주 모두가 함께 공생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밥상에서 멸치구경은 영원히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멸치 어민의 일갈(一喝)에 피서를 떠나는 우리 모두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반도 남녘하늘 아래 웅휘로운 지리산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과 한려수도가 감도는 백사(白沙)청송(靑松)의 고을 하동(河東). 섬진강을 경계로 서쪽은 호남의 전라도, 동쪽은 영남의 경상도땅.

옛부터 산자수명하여 수많은 시인묵객의 유토피아였다. 섬진강변의 대숲과 노량 앞바다의 낙조는 길 떠난 나그네로 하여금 시인이 되게 했다. 진주 백리, 순천 백리, 남해 백리, 구례 백리를 합쳐 남도 4백리의 중심에 있는 하동포구.

쌍돗배는 사라졌지만 ‘토지’, ‘역마’, ‘지리산’으로 대표되는 명작의 고향은 한국 문학사에 길이 남아있다.

시인 정공채의 생가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하동군 진교면 사기촌 가마터에도 방학과 휴가철을 맞이하여 경향 각지에서 많은 피서객이 찾아오고 있다. 이곳 가마터가 일본의 국보 이토(井戶) 찻그릇의 고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25년전이다.

일본의 다도 역사에서 이토 찻그릇은 ‘신기’(神器)로 불리운다. ‘신비의 찻그릇’, ‘환상의 찻그릇’, ‘자연을 창조하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맛’ 등 최고의 찬사로 가득한 이토 찻그릇의 고향을 찾으려는 일본인의 노력은 거의 100년의 세월에 걸쳐 계속되었다.

함경도설을 비롯하여 전라도 정읍, 경상도 김해 양산 진주 등 사람에 따라 제설(諸說)이 분분하였다. 그중에서 일본인 도자기학자 고야마후지오(小山富士夫)는 진주 부근설을 유력하게 주장하였다.

세월이 흘러 1970년대 중반부터 일본인 골동상에 의해 진주 일대의 가마터가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많은 양의 도편이 일본으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국보 이토 찻그릇과 비슷한 도편이 발견되는 하동군 진교면 사기마을의 가마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부터 일본 학계에 사기 마을의 가마터가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이곳 가마터가 한일 도자기 교류사에 한 획을 그은 것을 인정받아 경남 당국의 지원으로 복원되고 무명도공 추념비가 세워지는 등 옛 이토 찻그릇의 전통이 본격적으로 부활되기 시작한 것은 1984년부터다.

하동군 진교면은 400년이란 아득한 세월을 차와 찻그릇의 애달픈 사연을 간직한 채 남해 바닷가의 한적한 망각의 포구로만 존재해왔다. 꼬불꼬불한 갯벌은 꼬막이며 낙지를 잡는 진교 아낙네의 삶의 터전이며 약속의 갯벌이었다. 이 갯벌은 임란 전에 진제포(辰悌浦)라고 하여 일본으로 도자기를 수출하는 항구였다. <계속>

<현암 최정간 도예가 >

입력시간 2000/08/1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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