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개성과 판문점 사이

아무리 100명의 북한 인민이 “장군님 은덕으로…”라며 울부짖어도 세계 시민은 눈물을 글썽였지만 수긍은 안했다.

“남측 언론이 나를 정신분열증 환자라 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아는 북한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은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의 발언과 행동에서 ‘파격과 혼란’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그건 휴전선의 상징이며 민족분단의 역사 현장인 판문점과 개성에 대한 김 위원장의 무의식적 발언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한국 언론사 사장들과 함께 북한을 찾았던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이런 에피소드를 전했다. “김 위원장에게 화진포에 있는 김일성 별장 사진과 그곳에서 찍은 김 위원장의 어렸을 적 사진을 사진첩에 담아 선물했다. 김 위원장은 이를 보더니 매우 감격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화진포와 개성을 맞바꾸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된다’며 개성에 대해 강한 애착을 보였다.”

김 위원장의 개성에 대한 강한 애착은 언론사 사장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묻어나왔다.

“현대에서 개성 관광단지와 공업단지를 꾸밀 수 있도록 개성을 줬는데 이건 6·15 선언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서울 관광객을 개성까지 끌어들여야 겠습니다.(중략) 현대에 특혜를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중략) 개성에는 고적이 많습니다. 고려 왕건과 관련된 것도 그렇고 선죽교도 있고 박연폭포도 있습니다. 서울서 오기도 쉽습니다. 거기가 거기죠.”

김 위원장이 왜 개성을 ‘파격’의 장소로 삼았는지는 판문점에 대한 그의 혼란된 역사의식을 살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판문점은 1950년의 산물인데 개성 공업단지도 조성이 잘되고 하면 우리가 새로 길을 내야 합니다. 판문점은 열강의 각축의 상징인데 그대로 남겨놓고 새로운 길을 경의선 따라 내야 합니다.(중략) 조선문제는 민족끼리 동조해서 새 길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경의선 철길 따라 개성에 새 길이 난다는 의미가 있는데 언론도 여기에 동참해 주세요. 1950년대 산물인 판문점을 고립시켜야 합니다.”

1950년대 6월25일에서 시작된 6·25 전쟁이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되기까지의 역사를 아는, 적어도 남북을 오간 200명 이산가족에게 김 위원장의 “1950년대 산물인 판문점은 고립시키고 개성으로 가는 새 길을 열자”는 이야기는 ‘파격’일까, ‘혼란’일까.

적어도 휴전회담을 제의했고, 첫번째 유엔군측 정전회담 대표였던 매튜 릿지웨이 유엔군 사령관(‘한국전쟁’의 저자)과 죠이 터너 제독(당시 미 극동 해군 사령관, ‘공산주의자와의 협상’ 저자)에게는 김 위원장의 새로운 역사는 ‘파격’이나 ‘혼란’이기 어전에 ‘반복’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던져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릿지웨이 대장은 1951년 6월30일 방송을 통해 중공군 사령관 팽더하이와 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에게 정전을 위한 회담을 원산만에 있는 중립국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에서 가질 것을 제의했다.

공산군측은 정전에는 동의했지만 회담장소로는, 그때는 무인지대였던 38선 접선지역이자 6·25발발 이전에는 남한의 땅이었던 개성을 제의했다. 유엔군측은 이를 받아들였다. 개성에서의 정전회담은 10월25일 판문점에 시작돼 회담 개시 2년이 넘어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리지웨이 등 많은 한국전 참전 장군과 역사가들은 본래 남한 땅이었던 개성을 회담 장소로 선정한 잘못이 정전회담을 오래 끌게 하고 심리적으로 북한에 승리자의 위세를 주었다고 보고 있다.

유엔군측 대표단이 개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개성은 공산군의 경비지역이었으며 유엔군의 흰색 기는 항복의 표시였다. 그곳에는 공산측 기자 밖에 없었다.

공산측은 동부전선에서 화진포 별장을 뺏기고 밀리는 상황에서 원산 앞바다에 떠있는 병원선에서의 회담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미조리호 함상에서 한 항복 서명쯤으로 생각해 이를 보이콧했던 것이다. 그후 개성은 공산군 측에 한반도의 통일을 지연시키는 전진기지 노릇을 해왔다.

과연 김정일 위원장의 이런 혼란된 역사의식이 바로 잡힐지 역사는 다시 한반도를 지켜보고 있다.

<박용배 세종대 겸임교수>

입력시간 2000/08/2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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