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양 金'이 믿는 파워맨

박지원 장관, 뛰어난 순발력과 헌신으로 승승장구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이 ‘국민의 정부’, 즉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서 ‘가장 잘 나가는’인사중 하나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 박장관이 갖고 있는 힘은 바로 김대통령의 ‘신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대체로 고개를 끄덕인다. 김대통령의 신임은 남북 정상회담을 최종적으로 성사시키는 단계에서 대북 ‘밀사’로 박장관을 활용한 대목에서도 여실히 증명됐다.

당시 청와대 박준영 대변인은 박장관이 밀사 역할을 맡게 된 배경에 대해 “대통령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북정상회담 성사의 막후주역

남한의 ‘실세’는 북한에서도 알아 준다. 박장관이 언론계 등을 중심으로 접촉하는 인사의 층이 다양하고 때로 저녁 자리에선 ‘통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술이 거나해지면 주위의 권유가 없어도 대중가요 한두곡쯤 부르는 데 인색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노래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또 박장관이다. 평양에서도 남한의 실세인 박장관이 ‘노래 부르기’를 즐겨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로 6.15 공동선언이 발표된 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마련한 환송 오찬에서 남북간에 빈번하게 술잔이 오가던 끝에 북한측이 박장관에게 노래를 청했다. 평소 같으면 주저없이 마이크를 잡았을 박장관이지만 이 때만은 김대통령의 눈치를 살폈다.

김대통령으로부터 “한번 해 보라”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박장관은 우선 ‘내곁에 있어주’로 북측의 반응을 떠봤다. 김정일 위원장까지 나서 ‘앵콜’을 요청했고 박장관은 내친 김에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를 멋드러지게 불러 제꼈다.

노래 두곡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박장관의 특장인 정치적 순발력과 재치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박장관은 14대 국회때 전국구로 배지를 달았다가 15대때 고배를 마신 자신의 처지에 빗대 “남한에서는 초선밖에 못했지만 북한에 와서 노래로 재선을 했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낸뒤 김정일 위원장에게 “서울에 꼭 한번 오십시오”라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슬쩍 끼워 넣었다.

이에 대해 김위원장이 “꼭 갈겁니다. 서울에 가서 박장관이 재선, 3선, 4선하는 것을 도울겁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듣기에 따라선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두주불사’소리를 듣던 박장관이 요즈음은 술을 상당히 자제한다. ‘폭탄주’석잔 이상은 일단 사양하고 본다.

김대통령으로부터 ‘걱정’을 들었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 준비로 김대통령이 박장관을 밤에 수시로 청와대 관저로 부를 때 였는데 어느날 밤 11시 호출을 받고 다소 불콰해진 상태에서 관저로 올라갔다. 김대통령은 이때 “건강에 유의하라”는 뜻으로 주의아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DJ와 미국서 인연, 절대 신임

남북 정상회담의 뒷얘기를 다소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박장관에 대한 김대통령 신임의 배경이 되는 ‘스킨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다.

정치인으로서의 박장관이 김대통령 곁에 굳건히 서 있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정치권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지런함과 성실함, 김대통령에 대한 헌신성, 순발력과 재치,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특유의 언변 등을 든다.

야당 시절 아침 6시30분이면 어김없이 김대통령의 일산 자택에 나타나는 박장관을 보고 김대통령 직계인 ‘동교동’계 조차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며 혀를 내둘렀다.

김대통령이 하루중 가장 먼저 찾는 사람이 박장관이고 또 가장 빈번하게 찾는 사람도 박장관이라는 얘기는 박장관이 국민의 정부 출범때 청와대 대변인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그대로 계속됐다.

김대통령과 박장관의 ‘스킨십’은 어떤 기회에 박장관이 스스로 밝혔듯이 17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3년 박장관은 미국 뉴욕에서 성공한 재미 사업가였다.

이미 뉴욕한인회 회장과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던 그가 당시 사형선고에서 무기로 감형된 뒤 다시 형집행정지를 받고 미국에 망명중이던 김대통령을 만나게 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박장관은 전남 진도출신의 ‘호남인’이었기 때문에 망명길에 나선 김대통령을 보는 시선이 남달랐을 것이다.

김대통령의 망명시절 인연을 맺은 인사들은 이른바 ‘해외파’로 분류된다. 민주당 유재건·김경재 의원, 유종근 전북지사, 김대통령 처조카인 이영작 박사 등이 그들인 데 이들이 보기에 박장관이 김대통령을 모시는 정도는 ‘극진’했었다.

박장관은 이때 가발및 잡화 사업체로 ‘데일리 패션(Daily Fashion)’이라는 탄탄한 사업체를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대통령의 망명 생활및 미주내 인권문제연구소 운영에도 상당히 재정적인 뒷받침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박장관은 99년2월 공직자 재산신고때 전년도보다 1억4,000여만원이 늘어난 37억4,600여만원을 신고했다. 여기엔 뉴욕의 사업체및 부동산, 뉴저지주의 저택 등이 한몫을 했다.


미국서 자수성가, 한국서 정치적 성공

김대통령이 망명에서 돌아와 87년 대선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박장관은 뉴욕에서의 생활을 접고 국내에 따라 들어와 김대통령에게 운명을 건다.

87년 고향인 진도의 평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정치를 시작한 박장관은 14대 전국구로 국회에 들어온 이후엔 줄곧 당 대변인으로 김대통령의 ‘입’역할을 해왔다.

92년부터 97년까지 구 민주당과 국민회의를 거치면서 최장수 대변인의 기록을 남기기도 한 박장관은 김대통령과 관계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저돌성 때문에 때론 언론으로부터 ‘과잉 대응’을 한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이와함께 박장관은 야당 시절이나 지금이나 김대통령과 지근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자신의 직책과는 관계없는 ‘월권 행위’를 하고 있다는 공격도 심심찮게 받는다.

사업가로서도 미국에서 내로라 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를 이뤘고 이후 정치인으로서도 탄탄함을 더해가는 박장관은 그러나 학교 성적만으로 보면 그리 우수한 편은 아니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던 선친은 후에 좌익활동을 했다는 의심을 받기도 하지만 박장관이 여섯살 때인 1948년 세상을 뜨고 만다. 가난할 수 밖에 없었던 박장관은 지역 명문인 목포고에 진학하지 못하고 문태고에 입학했다.

문태고 재학시절에도 박장관이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교시절 지금의 부인인 한살아래 이선자씨를 만나 ‘순애보’를 키웠던 얘기는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

이씨 부모의 반대로 우여곡절을 겪었고 또 박장관이 단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럭키금성 상사에 근무할 때 회사 최고위층이 박장관을 탐내기도 했지만 이씨와의 만남은 결국, 결혼으로 이어졌다. 박장관은 럭키금성상사에 있을 때 가발무역을 담당했는 데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주재원으로 있던 뉴욕에 주저앉아 자수성가하는 밑거름이 됐다.

고태성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0/08/22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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