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쩍은 일본- 오른쪽이 강해진다

커지는 우파목소리, '성전'으로 둔갑하려는'침략전쟁'

일본의 8월은 늘 수상쩍다.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과 무조건 항복이 있었던 1945년 이래 8월에는 죽음과 패배의 기억이 각인돼 있다. 이 죽음과 패배에 대한 일본의 애매한 태도가 수상쩍음의 이유였다.

패전 직후에는 죽음과 패배의 원인을 따지려는 분위기가 무성했다. 한반도의 강제 합병과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은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은 군인과 민간인 등 310만명이 숨진 처참한 전쟁의 종식을 반기고 평화를 다짐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8월의 기념집회는 일본 전몰자는 물론 한중 양국 등 아시아 각국의 고통을 함께 되새기고 두번 다시 어리석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평화 기원·다짐으로 치러졌다.

그러나 전쟁의 기억이 흐려지면서 원인을 외면한 채 죽음과 패배라는 결과만을 부각하는 주장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런 주장은 전몰자의 명예를 원하는 유족의 헛된 욕심과 죽음에 대한 대중의 연민을 바탕으로 독버섯처럼 번졌고 마침내는 군국주의 침략 전쟁조차도 아시아 해방을 위한 성전으로 둔갑시켰다.

불행히도 패전후 일본의 역사는 이런 상반된 태도의 균형으로 이어져 왔다. 상황에 따라 어느 한쪽으로 약간 기울었다가는 이내 균형을 되찾는 시소 게임같았다. 정치적으로 만년 여당인 자민당이 오른쪽에 앉아 무게중심이 크게 오른쪽으로 기운 듯했지만 중심 파벌이 늘 시소의 안쪽에 자리를 잡는 바람에 균형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이런 애매한 균형은 무엇보다 일본이 국내의 역사 청산에 실패한 때문이다.

패전 직후 한때 일본의 진보 세력은 미군정의 지원하에 군부를 비롯한 전쟁책임자와 우익 국가주의 세력의 척결을 시도했다. 절호의 역사 청산 기회였으나 냉전은 미군정으로 하여금 청산 대상인 구세력의 복권에 나서도록 했다. 식민지 통치에 협력한 친일 세력의 청산에 실패한 한국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야스쿠니신사에 울려퍼진 군가

‘종전’ 55주년을 맞은 8월15일 오전 도쿄 도심의 기타노마루 공원 안에 있는 니혼부도칸(日本武道館)에서는 일본 정부의 공식 전몰자 추도식이 열렸다.

아키히토 천황과 모리 요시로 총리는 추도사에서 전몰자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의 슬픔을 달래는 한편 아시아 각국의 국민이 겪은 고통과 피해, 슬픔에 대해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혔다.

기타노마루 공원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황궁 바로 북쪽에 있다. 여기서 다리로 해자(垓字) 유적인 호수를 건너면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역이 나온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전몰자를 안장한 이곳에서도 정부의 공식 추도식과 거의 동시에 추도식이 열렸다. 민주당과 사민당 등 야당과 평화유족회 등 시민단체가 주도한 모임이었다.

같은 시간 야스쿠니(靖國)신사에서는 일본유족회 주최의 추도식이 열렸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앞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은 총리의 공식 참배와 헌법 개정을 촉구했다.

주름이 가득한 과거 해군 출신들이 옛군복을 입고 군가에 맞추어 신사 곳곳을 행진하는 모습, 불타는 진주만과 가미가제 특공대의 자폭을 그린 그림 앞에서 손자·손녀들에게 과거의 무공을 자랑하는 할아버지의 모습 등이 올해도 영사기를 틀듯 그대로 반복됐다.

우익단체의 선전차량이 쏟아 내는 군가와 개헌및 자위대 역할의 강화 주장, 가두 시위에 나선 진보적 시민단체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 및 헌법 수호 구호로 도쿄 도심은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겉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날까지 야스오카 오키하루 법무성장관 등 3명의 각료가 공식으로, 7명의 각료가 사적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모리총리 등 나머지 핵심 각료가 한국과 중국 등의 국민 감정을 고려, 참배하지 않은 것도 지난해와 같았다. ‘다 함께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 78명의 집단 참배도 마찬가지였다.


이시하라의 당당한 신사참배

우려할 만한 변화의 불씨는 있었다.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 지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였다. 도쿄도 지사로서는 최초인 참배 직후 그는 공식 참배 여부를 묻는 기자들에게 “그런 구별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명부에는 ‘도쿄도 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라고 썼다”고 밝혔다.

그의 참배는 총리의 공식 참배와 달리 주변국의 항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그러나 모리 총리가 ‘기준 미달’이라는 냉소속에 존재감을 거의 상실하면서 상대적으로 그의 존재감이 커졌다는 점에서 일본 국민에게 던지는 영향은 무시하기 어렵다. 그만큼 그의 인기가 높다.

이튿날인 16일 도쿄도가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 500명의 모니터 요원 가운데 15.3%가 이시하라 행정에 ‘만족’을, 59.3%가 ‘만족하는 편’이라고 응답했다. 74.6%의 지지도는 지금까지의 조사에서 가장 높아 그의 인기를 확인시켰다. 모니터요원들은 주로 은행 외형 표준 과세의 도입 등 이시하라 지사의 과감한 정책과 정부에 당당하게 할 말을 하는 태도에 대해 호감을 표했다.

‘이시하라 신드롬’이 제기하는 우려는 ‘제3국인’ 발언 파문에서도 확인됐다. 그는 4월9일 육상자위대 제1사단 기념식에서 “대지진 등 재해가 일어날 경우 불법 입국한 제3국인의 소요가 일어날 수 있다”면서 치안 유지를 위한 자위대의 출동 가능성에 언급했다.

‘제3국인’은 패전 직후 미군정하에서 한국·대만인 등을 미일 양국민과 차별해 부른 용어라는 점에서 재일동포와 일본 지식인들이 그의 고정관념을 비난했다. 그러나 외국인 범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불안을 느껴 온 대중은 그가 중국인의 범죄 행위 등을 질타한 데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일본 극우파의 전도사

여세를 몰아 그는 9월3일 자위대를 대규모로 동원하는 ‘종합 방재(防災)훈련’을 강행할 계획이다. 대지진 등에 대비하기 위해 그동안 수도권 7개 자치체가 9월1일 열어 온 합동훈련과는 별도로 도쿄도 단독으로 처음 여는 이 훈련은 그 성격을 둘러싸고 논란이 무성하다.

이시하라 지사는 훈련의 목적에 대해 “자위대가 얼마나 빨리 출동해 소요를 방지·진압할 수 있느냐를 점검하는 것도 과제의 하나”라고까지 밝혔다. 실제로 훈련에는 육·해·공 자위대원 약 7,800명과 항공기 100대, 차량 1,000대, 호위함과 수송함 4·5척이 동원된다.

자위대의 집결·야영, 250㎙의 부교 건설 훈련, 항공기의 정찰 비행, 호위함과 수송함을 이용한 이재민 수송 훈련등을 실시할 계획이어서 종합 군사훈련을 방불케 한다. 언론사의 취재용 헬기 를 포함한 모든 항공기의 관제도 항공자위대에 맡길 방침이다.

이런 일련의 정책 결정에 대해 이시하라 지사는 “도쿄로부터의 일본 개조”를 주장하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와 쌍벽을 이룬 우파의 논객이었던 그가 지향하는 일본의 개조 방향은 너무도 분명하다.


공식신사참배 돌파구 될 수도

그가 총리·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라는 우파의 숙원을 푸는 돌파구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사실상 공식참배를 한 그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할 때 일본 정부와 자민당이 무시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자민당은 지난해부터 내각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를 위한 묘안에 골몰해 왔다. 외국의 국립묘지 헌화 관행을 들어 내각뿐 아니라 외국의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헌화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을 들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일본유족회를 중심으로 한 우파의 오랜 압력에 떠밀린 때문이다.

내각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는 크게 보아 두가지 제약이 있다. 우선 종교적 문제다.

야스쿠니 신사는 1868년의 메이지 유신 직후 바쿠후(幕府)를 무너뜨린 무진전쟁 이후 전몰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에 들어 선 초혼(招魂)신사의 하나로 1869년에 세워졌다. 1879년 야스쿠니 신사로 개명됐으며 지방의 초혼신사도 1939년에 호국신사로 대부분 이름이 바뀌었다.

‘나라를 평안히 한다’는 이름대로 역대 전쟁의 전몰자들을 한꺼번에 제사지내는 초혼신사의 으뜸으로서 황실이 경비를 부담했다. 국가 신도를 상징하고 군국주의 확대 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했다는 점에서 전후의 좌파정권은 한때 야스쿠니 신사의 철폐를 검토하기도 했다.

현행 헌법이 종교의 자유와 정교 분리를 규정함에 따라 야스쿠니 신사는 특별한 지위를 상실, 다른 신사와 마찬가지로 종교법인으로서 명맥을 이어왔다.

따라서 국교가 없는 일본에서 특정 종교기관에 대한 공식 참배는 정교 분리 원칙에 어긋난다.

더욱 큰 것은 일반 국민의 반발과 대외적 문제이다. 1975년 미키 다케오 당시 총리가 종전 30주년을 맞아 우파의 요구에 못이겨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당시 국내의 반발이 무성했지만 ‘사적’ 참배라는 형식으로 타협했으며 이후 연례 행사처럼 이어졌다.

그러나 우파는 계속 공식 참배를 요구했으며 이에 처음 응한 것이 85년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였다. 나카소네총리 내각의 공식 참배에 대해 일본의 진보 세력은 A급 전범 문제를 들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으며 한중 양국의 반발이 뒤따랐다.

특히 중국은 A급 전범을 순교자로 제사지내는 행위를 크게 성토했다. 일본 정부는 크게 놀랐고 이듬해부터 공식 참배는 커녕 그동안 이어졌던 ‘사적’ 참배도 근절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민당은 A급 전범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우익의 반대에 부딪쳐 있다.


군사역할에 대한 개헌논의

우려할 만한 또 하나의 움직임은 개헌 주장이다. 올해 중참의원에 헌법조사회가 설치됨으로써 본단계에 접어 든 일본의 개헌 움직임 자체는 크게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제1야당인 민주당조차 연립여당과 비슷한 자세를 보이고 있듯 애초의 개헌논의는 헌법 9조의 무력포기·군대 부정 조항이 핵심이 아니었다.

50여년 동안 한자도 고쳐지지 않은 헌법에 환경권을 신설하는 등 손질의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 기본 취지였다. 헌법 9조의 개정도 당연히 대상이지만 재무장과 군비 강화를 뒷받침하는 식의 개정은 일본 국내의 논의 구조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최근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은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의 개정으로 자위대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일본 안보에 위협이 되는 주변 사태가 일어날 경우, 미군의 후방지원을 자위대가 맡는다는 가이드라인은 한반도 주변이나 대만해협의 유사시 자위대의 실질적인 참전길을 연 셈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자민당내의 최대 파벌로 당내의 헌법·역사 문제와 관련한 강경 주장을 막아 온 하시모토파(구오부치파)의 지배력이 약화하고 있는 점이다. 다케시타 노보루·오부치 게이조 전총리의 돌연한 죽음으로 하시모토파는 구심점을 잃었다.

아직까지 당내 정치를 장악하고는 있지만 차기 총리 경선에 내세울 대표주자가 없는 상황이 이어지면 오래지 않아 주도권을 상실할 수 있다. 헌법·역사 문제에서 전통적으로 극우파에 가까운 주장을 펴 온 모리파의 움직임이 특히 눈길을 끈다.

그동안 일본에서 이런 흐름은 일시적 현상에 그치고 곧 접시 저울의 균형이 회복됐다. 언론의 활발한 문제 제기로 여론이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젊은층은 모든 정치적 문제에 극도의 무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역사는 활발한 논의를 이루지 못한 채 정치적 무관심과 막연한 불만이 만연하고 외부의 자극이 있을 경우 대중은 쉽게 선동에 휩쓸릴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일본의 장기 불황과 정치 무관심, 중국의 대국화 움직임이 자칫 그런 조건을 마련하는 듯한 상황이 길게 보아 가장 큰 불안 요인이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08/22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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