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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탐구] 인물사진작가 류은규

[인간탐구] 인물사진작가 류은규

"조선족 대서사시 사진으로 씁니다"

사진작가 류은규(38). 서울말과 평양말이 뒤엉킨 채 오열이 터지던 극적인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순간에 그는 서울 한복판 자신의 전시실에 있었다.

지난 8월21일까지 12일동안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잊혀진 흔적Ⅱ-사진으로 보는 조선족 100년사’ 기획전. 똑같이 한반도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고도 서울과 평양, 그 어느쪽의 만찬에도 초대받지 못한 ‘제3국민’ 조선족의 아픈 역사를 홀로 지키고 있었다.

19년전부터 지리산 청학동을 쫓아다니던 바로 그 사내다.

서울에서 태어난 도시 토박이면서도 이유 모를 향수에 붙들려 지금껏 청학동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자. 지난 8년동안은 조선족이 그의 열애대상이었다. 오죽하면 감히 사회주의 국가에 직접 뛰어들어서까지 백방으로 찾아낸 350점의 사진을 이번에 풀어놓았다. 갖고 있는 1만2,000여점의 사진 중 추리고 추린 것이다.


중국 조선족 역사 낱낱이 드러나는 사진들

1년중 3분의2는 중국에서 살아야 하는 그로선 일면 위험한 짓이기도 하다. 당장 이달 말이면 연변대 예술대 사진학과 교수이자 민족연구소 연구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그가 중국 정부조차 드러내길 꺼리는 소수민족 조선족의 역사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 걸린 사진중 50점 정도는 중국 정부가 보게 될 경우 당장이라도 출처조사부터 하자고 달려들 민감한 자료다. 전체적으론 90% 이상이 세상에 첫 공개된 것. 그중 약 20%가 외부누출이 금지된, 중국 정부의 내부용 자료들로 채워졌다. 그가 부지런하고 용감한 인물임에는 이견을 달 여지가 없다.

“우리는 물론 조선족들 조차 조선족의 역사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조선족에겐 지금이 과도기입니다. 인구는 점점 줄고 남북문제에서도 뒷전에 소외된 듯 보이지만,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들이 오히려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젠 감상적으로 무작정 그들을 한국인으로 끌어안는 것도 우리에게나, 그들 자신에게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엄연히 중국땅에서 중국 정부 아래 살아가는 한국계 중국인일뿐 이제는 분명한 선을 긋고 냉정하게 공존공생할 방법을 찾는 것이 그들의 살 길입니다.

다만 역사는 잊지말자는 겁니다. 과거 어떤 이유로 중국에 건너갔든, 그들의 선조가 어떠한 역사를 헤치며 살아왔고 또 그 후손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흔적만은 잃지 말자는 겁니다.

저는 사진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역사 속의 사진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고 싶을 뿐이고 앞으로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정리할 것인가는 학자나 정치인의 몫이겠지요.”


고단한 삶 고스란히 담겨

문화대혁명 무렵 정치적 탄압이 두려워 피치못하게 남자의 모습을 잘라낸 어느 반쪽짜리 가족사진, 한국전쟁 당시 ‘가진 거라곤 수류탄과 사람뿐’이라던 마오쩌둥(毛澤東)의 말 그대로 수류탄을 들고 미군 탱크에 육탄돌진하는 인민군, 정치적인 이유로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도 상대적으로 소외돼왔던 조선의용군의 전사자 추모식 장면 등 류씨의 사진은 조선 말기 만주땅으로 처음 이주해가던 18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방대한 시간의 기록들.

그간 베일에 싸여있던 조선족의 고단한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나타나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화제가 됐던 하나. 지금까지 홍범도 장군의 조카로 알려져 있던 사진속의 어린 여인이 실은 현지처였던 것으로 새롭게 밝혀지기도 했다.

“홍범도 장군은 당시 개인 자격으로 건너간 건데 어떻게 조카까지 대동할 수 있을까, 그전부터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직접 알아봤더니 현지 학자들이 현지처라는 사실을 확인해주더군요. 그외에도 8년간 직접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던 오류들을 많이 바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작업을 위해 중국생활을 결심한 것이 1993년. 직접 호랑이굴로 뛰어드는 격이었다. 아직 한중 국교정상화 이전이었던 당시 중국 입국때의 기억은 지금도 스릴 그 자체다.

중국어라곤 숫자 하나 셀 줄 모르는 실력으로 무작정 밀어붙인 중국체류 3년. 생후 6개월의 갓난 아기와 일본인 아내까지 동행한 일대 모험이었다. 까탈스런 입국허가를 얻어내는 것도 어려웠지만 막상 전세기를 타고 중국 상공으로 들어설 땐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온 정신이 떨렸다.

말로만 듣던 공산주의 사회, 일은 고사하고 자칫하면 내 목숨도 어찌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숫제 공포심이 밀려든 것.


두려움에 휩싸여 시작된 중국생활

“하지만 한달쯤 지나고 보니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무리 체제가 다르고 생활수준이 차이 나도 어디나 남녀가 사랑을 나누고 각자의 행복을 찾는 모습은 다들 비슷했거든요.

특히 저희 가족이 갔을 땐 당시 하얼빈에 한국인이 거의 없었을 때인데 이웃에 사는 한족들까지 외국인이 왔다며 다들 친절하게 대해줘서 금새 적응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나중엔 설사 문제가 생기더라도 외국인에게 기껏해야 추방명령밖에 더 무서운게 있겠냐, 그런 배짱도 생기구요.”

생계는 하얼빈 농업대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게 된 부인이 맡고 그는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했다. 사진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집을 찾았는지 기억할 수 조차 없다. 조선족이 사는 집이면 어디든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이해시키는 일부터가 난관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그의 말을 믿으려들지 않았다. 방대한 시간의 사진자료을 모아 책을 내고 역사를 정리한다는 일이 가능하기나 하냐는 것이었다. 일껏 소문을 듣고 찾아갔지만 고인의 유품을 태워없애는 관습 때문에 헛걸음을 하는 일도 부지기수.

사진이 있다해도 가난한 시절에 귀한 쌀과 바꿔가며 비싸게 찍은 사진을 선뜻 낯선 외지인에게 내주려들지 않아 끊임없이 설득하고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애를 먹인 것은 그중에서도 해방 이후의 자료들. 특히 개인이 아닌 공적 기관이나 정부에서나 보유한 한국전쟁과 문화대혁명 시기의 사진은 지금도 경로를 밝힐 수 없을 만큼 어렵게 얻었다.

그중에서도 문화대혁명기는 중국내 50여개 소수민족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만큼 고통이 심했던 조선족의 대 파란기. 이 예민한 사안을 뒤지고 다니는 그에겐 알게모르게 감시의 시선도 따랐다.

그러나 뭣보다 부인 도다 이쿠코(39)씨의 도움이 아니면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일이었다. 낯설고 두려운 객지까지 남편의 꿈을 좇아 기꺼이 뒤따라나선 아내.

그녀의 헌신적인 바라지가 컸다. 몇해전 ‘한 이불 속 두 나라’라는 책의 저자로도 이름이 알려졌던 그녀는 일본 유학생으로 한국에 건너와 한 일본잡지 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류씨와 만나 결혼까지 이른 고려대 사학과 출신의 재원. 사귀던 당시부터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아 여러모로 의기투합했던 부창부수의 콤비다.


일본인 아내와의 의기투합

중국 생활 두달 만에 풍토병으로 앓아누웠을 땐 특히 류씨를 감동시켰던 도다씨다. 당시 그의 증세는 뿌연 석회질 물질이 가라앉을 만큼 형편없는 식수를 마시고 장에 결석이 생긴 것으로 ‘애 낳을 때보다 더 아프다’는 극심한 통증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나 중국어를 몰라 병원에도 가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앓기만 하는 류씨 옆에서 도다씨는 밤새 울며 일본어로 병세를 적은 뒤 그것을 다시 중국어로 번역해 이튿날 그를 병원에 데려갔다.

그때 아내의 눈물을 보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여자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맘속으로 맹세했다는 류씨. 그날 이후 오늘까지 실제로 ‘절대 충성’의 애처가다. 절해고도처럼 외로운 이국땅에서 살아본 부부만이 이해할 수 있을 남다른 결속이다.

“지금까지 나 때문에 10년이나 고생한 사람인데 이젠 제가 집사람을 위해줘야 할 차례입니다.

저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일도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사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다는 건데,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다시 생활도 제가 책임을 지고 이젠 집사람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끔 도울 생각입니다.

그외엔 우리 부부도 여늬 부부와 다를게 하나도 없습니다. 국적이나 한일감정 같은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항상 객관적인 입장으로 문제를 바라보다보니 언제나 생각이 비슷하거든요.

가령 독도문제나 정신대 문제만해도 저 사람부터 일본의 잘못이라고 인정합니다. 남편 나라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 그렇다고 보는거죠. 그런 점에서도 우린 호흡이 참 잘 맞습니다. 다만 우리 부부는 한-일전으로 열리는 야구나 축구경기는 안 봐요. 그건 또 별개의 문제거든요.”(웃음)

오래전 잡지사와 출판사 등지에서 봉급쟁이 생활도 해보았던 류씨. 그러나 자신의 꿈을 생각할 여력도 없이 마모되기만 하는 직장생활이 싫어 프리랜서로 나온 뒤 4년전엔 뒤늦게 대학원 공부를 시작, 일과 공부를 번갈아가며 올해에서야 비로소 석사과정을 마쳤다.


“조선족이야기 앞으로도 계속”

10여일 후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한족과 조선족 제자 앞에 설 그는 그러나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은 사람이다.

2년전에 열었던 1회 전시회 때에 비해 훨씬 성대하다 할 이번 행사도 그에겐 사실상 개막전에 불과. 자료수집가가 아닌 사진작가 류은규의 진짜 목소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우리 나이로 불혹에 들어서는 내년은 그가 청학동 사람을 사진에 담아온지 꼭 20년째를 맞는 해. 이를 기념하는 전시회를 마련한 뒤 다시 그의 조선족 이야기는 계속될 예정이다.

8년전 그로 하여금 떨리는 마음으로 중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했던 원래의 목표, 자신이 직접 찍은 항일운동 관련 사진이며 후손의 모습을 비롯해 5년내 한국과 중국, 어제와 오늘을 잇는 조선족의 대서사시를 그려낼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세련된 인물사진만큼은 그에게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바깥에선 화려한 상업성 사진도 능수능란하게 선보이는 그지만, 이 일만큼은 ‘사진 못 찍는다’는 소리까지 때로 들어가며 기어코 자기식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만 담겠다고 고집하는 그다. 그것이 차라리 어울리는 땅, 아직도 때묻지 않은 사람들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정영주 자유기고가 mar10@chollian.net

입력시간 2000/08/2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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