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3형제 "망신은 이제 그만"

상처만 남긴 형제간 다툼, 화해 위해 발빠른 움직임

“5개월 싸움에 50년 쌓아온 현대의 명성이 한꺼번에 날아갔습니다.”

현대 구조조정위원회의 자구계획과 현대차 계열분리안 발표로 현대사태가 일단락되던 지난 8월13일 현대 구조조정위원회 김재수(金在洙) 위원장의 기자회견을 듣던 현대그룹의 한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올 3월 현대 경영권 분쟁에서부터 현대투신사태, 현대건설 유동성위기, 현대차 계열분리진통 등으로 이어진 일련의 위기는 싸움의 당사자인 현대 3왕자를 모두 패자(敗者)로 만들었다.

8·13자구계획 발표로 현대사태가 해결 수순을 밟으면서 정몽구(MK)현대차 회장과 정몽헌(MH)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형제의 갈등도 물밑으로 가라앉은 형국이다.

양 진영이 서로에 대한 공격과 언급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 모두가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또다시 분란을 일으켜 더 얻을 게 없기 때문이다.


MK·MH 공익사업 공동참여 계획

이때문에 그동안 갈등의 골이 깊어진 이들 오너 형제가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특히 현대가 앞으로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지분 매각 자금으로 설립을 검토중인 ‘어린이 재단’등 공익사업에 두 형제가 공동 참여할 계획이어서 화해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두 사람이 올들어 빚어진 일련의 사태로 부친인 정 전 명예회장과 현대그룹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야한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의 고위 관계자는 “정 전 명예회장의 결단으로 계열분리가 이뤄지고 갈등이 해소된 만큼 어떤 식으로든 형제간 화해가 이뤄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현대차 관계자도 “걸림돌이 사라진 만큼 앞으로 사태가 정리되면 서로 악수하는 모습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정몽구 회장이 명예회장 기념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그룹이 검토하고 있는 정 전 명예회장의 공익재단 설립 때 함께 참여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현대 주변에선 정몽구 회장은 물론 정몽준(MJ) 현대중공업고문 등 형제와 가족 친지들이 정몽헌 회장에게 “너무 한다”며 서운해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 관계자는 “갈등의 원인은 자동차 경영권에 대한 몽헌쪽의 욕심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불씨는 지난 3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에 대한 몽구 회장측의 한밤중 전격 인사”라고 지적했다.

또다른 현대 관계자는 “5월말 3부자 동반퇴진 선언 이후 오해가 증폭돼 관계가 더욱 소원해졌다”며 “몽구 회장이 14층 집무실에서 12층 몽헌 회장 방을 찾아가 화해하려다가 의견 차이만 확인하고 돌아선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명예회장의 형제들이 ‘우리 집안은 장자 중심이므로 자동차를 몽구에게 줘야한다”고 말해온 것으로 안다”며 “명예회장 형제 중 한명은 몽헌 회장을 불러 ‘왜 욕심을 부리느냐’고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몽준 고문쪽인 현대중공업의 한 임원은 “몽구 회장과 몽준 고문 뿐만 아니라 가족 친지들은 몽헌 회장이 자동차와 중공업에 욕심을 부리는 것으로 비춰진 것은 몽헌 회장쪽 가신그룹이 일처리를 잘못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며 “몽헌 회장이 지나치게 이들을 감싸는 점에 대해 안타깝고 답답해했다”고 덧붙였다.


가신 정리되면 화해 빨라질듯

7월29일 있었던 정 전 명예회장의 선친 제사에 몽헌 회장이 외국에 머무른 채 참석하지 않은 점도 이같은 가족 친지들과 몽헌 회장의 냉랭한 기류와 관련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정 전 명예회장의 한 측근은 “몽헌 회장이 할아버지 제사에는 늘 참석해왔는데 그날은 제사에 모인 친지들이 몽헌 회장이 나타날 것으로 전혀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최근 장자인 MK의 역할론이 대두되면서 화해무드는 더욱 힘을 얻고 있다. 그동안 내분의 불씨로 작용했던 계열분리 문제가 해소된 마당에 더이상 다툴 이유가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MK는 최근 현대사태 와중에서 MH측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면서 화해의 손짓을 보냈고 주위에도 가족화합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누차 피력했다는 게 측근의 설명이다.

MK가 최근 서울 중앙병원에 입원중인 정 전 명예회장을 병문안했을 때도 분위기가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금명한 모종의 가족행사가 열릴 것이라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양측의 화해에는 정몽준 고문과 정 전 명예회장의 동생인 정상영 KCC회장이 적극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두 사람은 정 전 명예회장의 의중을 헤아리면서 암암리에 갈등을 중재해왔다. 그동안 형제간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돼온 ‘가신그룹’의 문제경영진들이 명분과 모양을 갖춰 어떤 형태로든 퇴진하고 나면 양측의 화해 행보는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김호섭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08/24 14:09


김호섭 경제부 drea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