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풍향계] 번지는 '실사 개입의혹' 파문

정기국회를 앞둔 정가에 민주당의 선관위 총선비용 실사 개입의혹 파문이 해일처럼 덮쳤다. 그렇지 않아도 국회법 날치기 파동 사과 문제를 놓고 정기국회 의사일정 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여야관계는 더욱 꼬이게 됐으며 정기국회의 순탄한 진행은 이미 물건너 간 형국이다.

발단은 8월25일 열렸던 민주당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윤철상 사무부총장이 한 발언. 최근 선관위에 의해 고발된 송영길 의원이 “당의 무관심 때문에 고발당했다”며 당지도부를 성토하면서 일이 벌어졌다.

윤 부총장이 발끈해서 “분명히 기소될 분도 당에서 신경을 써서 기소되지 않은 분이 10명이 넘는다”고 반박했다. 동교동 가신그룹의 막내 세대인 그는 선거 때 조직을 맡았고 총선 후에는 의원들의 총선비용 신고 지원 등 뒷치닥거리를 담당했던 인물.

윤 부총장은 “법정 선거운동 시작전에 선거 사무원들을 다 교육시켰고 선거 이후에도 수도권만 4차례나 교육을 실시했다”면서 “법정 선거비용의 2분의1만 신고하라는 교육까지 했다”고 말했다. 의원들이 선관위의 비용실사에 걸리지 않게 당으로서는 할 만큼 했다는 얘기였다.


민주당, 심대탄 타격

하지만 이 얘기는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될 비밀에 속한다. 지역구 당선자 227명 거의 대부분이 선관위 비용신고 때 실제 지출비용 내역과는 전혀 다른 ‘소설’을 썼다는 것은 다 아는 얘기다.

그러나 이것을 실토하는 것은 일종의 천기누설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말대로 “국가기강과 관련된 문제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선거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이다.

민주당은 이 일로 ‘중상 아니면 사망’의 심대한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했다. 일단 윤 부총장의 말이 실수였고 과장보도됐다며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서영훈 대표는 긴급 성명을 통해 “의총 발언 중 일부가 과정됐거나 사실무근이지만 이로 인해 물의가 일어난 데 대해 당대표로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검찰과 선관위에 압력이 통하느냐”는 말도 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관계 드라이브로 정국 주도권을 상실한 채 전전긍긍해오던 한나라당이 하늘이 내린 이 찬스를 그냥 둘 리 만무하다. 한나라당은 윤 부총장의 발언이 보도된 직후부터 총공세를 펼치고 나섰다.

당장 김대중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대통령은 여당 총재로서 응분의 책임을 느끼고 국민에 대한 사과와 관련자에 대한 문책 및 처벌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박순용 검찰총장의 파면과 유지담 중앙선관위원장의 자진사퇴도 요구했다. 검찰과 선관위는 그들대로 민주당에 대해서 강한 불만을 표출하고 나섰다. 여권 내부의 자중지란까지 일어나는 형국이다.


한나라, 정국주도권 쥘 찬스로 활용

한나라당은 정기국회 일정과는 상관없이 이 파문을 최대한 이슈화시켜 정국주도권을 탈환한다는 복안인 것 같다.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권 발동, 특검제 실시 등의 요구는 그 일환이다. 각종 규탄대회 청와대와 검찰, 선관위 항의방문 등 줄줄이 이벤트를 실천에 옮기거나 기획중이다.

이회창 총재는 “이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정기국회를 안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각종 민생법안과 추경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해 초조해 있는 여당을 상대로 정기국회와 이 문제를 엮는 연계 전술을 구사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한나라당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사안을 가지고 극한적 정쟁을 이끌어갈 경우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을 개연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민주당측은 “이회창 총재가 선관위에 의해 고발된 모 초선의원에게 ‘걱정하지 말라. 당에서 해결하겠다’고 말했다”며 ‘한나라당판 개입의혹’을 흘리고 있다. 일종의 맞불작전이자 물귀신 작전이다.

어쨌든 임기 반환점을 막 돈 김대중 대통령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악재를 만나 하반기 정국운영이 매우 힘들어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남북관계 진전을 통해 역사적 이정표를 세우며 내부 정국 경색도 돌파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한데 여기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진 것이다.

일부에서는 그동안 확실한 리더십 없이 실무자 중심으로 운영돼 온 민주당 지도체제가 필연적으로 부른 참사라는 분석을 제기하고 있다. 30일 경선을 통해 새 지도부를 구성한 민주당 지도부의 정치력을 주목하는 시각도 없지 않으나 당분간은 감정 대립 등 과열 경선의 후유증 처리도 민주당에는 버거울 것으로 보인다.

이계성 정치부 차장

입력시간 2000/08/2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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