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경제팀 "개혁전선 이상없다"

진념 재경부장관, "개혁성 부족"시각 불구 자신감 보여

오전 7시 여의도 국회 귀빈식당에서 당정회의 주재. 10시 청와대에서 대통령 주재 국민경제자문회의 참석. 낮 12시 프레스 센터에서 취임후 첫 외신기자 회견.

낮 2시30분 언론사 인터뷰. 오후 5시 과천청사에서 출입기자들과 정책 간담회. 8시 다시 시내로 나와 안국동 소재 모 한정식 집에서 이규성·강봉균·이헌재 전 재경부장관과 저녁 식사.

8월 23일 진념 재정경제부 장관의 하루 일정이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빼면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이런 강행군은 재경부 장관 취임(8월7일)후 20여일 동안 거의 매일 계속되고 있다. 비서들조차 “얼굴 뵙기 어렵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취임후 진 장관이 개별, 혹은 단체로 만난 외부인사는 줄잡아 100명이 훨씬 넘는다. 민·관 경제연구원장들과는 두 번 만나 경제현안을 토론했고, 경제학자들도 중견그룹과 원로그룹을 나눠 따로 모임을 가졌다.

재계(경제 5단체장)와 금융계(은행장)와 상견례를 끝냈고, 노동계 대표들과도 면담 일정이 잡혀 있다. 대통령 독대도 가졌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없던 ‘엔돌핀’이 솟아 나온다고는 하지만, 진 장관이 보여준 행동 반경은 환갑이란 나이가 좀처럼 믿기지 않을 만큼 넓고 거침이 없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팀웍 다져

진 장관은 원래부터 활동적이고 정력적이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친화력과 논리정연한 언변으로 ‘적’을 만들지 않기로 유명하다.

1996~97년 노동부 장관 시절 험난한 노동법 파동을 거치면서도 노와 사, 모두로부터 ‘믿을 만한 사람’이란 얘기를 들었다. 노사대립이 한창이던 80년대말엔 해운항만청장으로 임명되자마자 대표적 강성노조였던 항만노조 간부들부터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 통로를 터놓은 일화는 유명하다.

97년엔 난파선 기아자동차 회장으로 영입돼 정부와 채권단, 노조 틈바구니에서 훌륭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며 회사재건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경부 장관 취임후 20여일을 지켜 본 한 후배관료는 “역시 노회하고 발걸음이 빠르다”고 평가했다.

전임 이헌재 장관은 전형적인 ‘지장(智將)’형이었다. 빠른 두뇌 회전, 뛰어난 감각에 싸움도 ‘지능적’으로 펼쳐가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경제팀장, 즉 ‘보스’로서 팀원 장악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낙마’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진 장관은 ‘끌어안고 가는’ 스타일이다. 팀장의 덕목인 보스기질이 넘친다. 그는 취임초부터 경제팀의 제1 강령으로 ‘팀웍’을 강조했다. 전임 팀의 경질배경이 ‘팀웍’부재에 있었던 탓도 있지만, 가급적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고 매끄럽게 굴러가도록 다독거리는데는 일가견을 가졌다는 평가다.

진 장관은 재경부 장관의 역할에 대해 ‘치어리더론’‘바람막이론’을 얘기했다. “나는 선수가 아니다. 선수들이 신명나게 경기를 풀어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치어리더 역할에 충실하겠다.”

“각 부처가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면 얼마든지 청취하고 난상토론도 마다않겠다. 그러나 일단 정해진 방향에 대해선 각 부처가 절대 다른 목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대신 경제장관들이 외부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내가 확실한 바람막이가 되겠다.”


“경제시스템 바주는것이 진짜 개혁”

경제팀 5대 요직인 재경부장관, 경제수석, 기획예산처장관, 금융감독위원장, 공정거래위원장의 면면을 보면 진념 경제팀은 과거 어떤 팀보다도 강한 동질성이 발견된다.

사실상 호남과 EPB(구 경제기획원) 일색이다. 이근영 금감위원장만 충남·MOF(구 재무부) 출신일 뿐, 진 장관과 이기호 경제수석, 전윤철 예산처장관, 이남기 공정위원장등 4명이 EPB(구 경제기획원) 출신이자, 호남 태생들이다.

과거 강봉균·이헌재 경제팀에선 후배 팀장이 선배 장관(당시 진념 기획예산처장관과 전윤철 공정거래위원장)을 거느리는 구도가 짜여지는 바람에 종종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새 경제팀은 고시기수, 즉 공무원 경력서열로도 좌장인 진 장관이 가장 선배다. 팀장의 성향으로보나, 인적 구성과 서열로 보나, 진념 경제팀은 ‘탄탄한 팀웍’의 조건은 갖추고 있다.

하지만 무난함과 매끄러움이 최고의 미덕은 아니다. 장관의 성패는 어차피 정책의 성과로 판가름난다.

당면 최대과제는 누가 뭐래도 ‘구조개혁의 완결’이지만, 진 장관은 임명 때부터 ‘개혁성’에 관한 한 의문 부호가 따라다녔다. 한 경제학자는 “진 장관이 재경부장관에 임명되는 순간 ‘구조개혁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진 장관은 6공화국때 동력자원부 장관, 문민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 현 정부에서 기획예산위원장과 기획예산처 장관 그리고 재경부장관까지, 3대 정권에 걸쳐 5번째로 장관직을 맡고 있다. 정권을 넘나드는 장관 이력을 놓고 한편에선 ‘경제행정의 달인’‘위기관리의 대가’, 다른 한쪽에선 ‘색깔없는 철새관료’‘좌고우면(左顧右眄)형 인물’이란 엇갈린 평가가 나온다.

특히 ‘국민의 정부’ 2년반 동안 기획예산위원장과 기획예산처 장관으로서 그가 책임을 맡았던 공공개혁이 4대 개혁과제 가운데 가장 미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점도, 진 장관의 개혁성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그러나 ‘개혁성 부족’이란 말이 나올 때 마다 진 장관은 아주 불쾌하다는 반응과 함께 이렇게 주장한다. “요란하게 해야 개혁인가. 준비되지 않는 개혁은 화끈할 지 몰라도 국민에게 불편만 준다. 나는 그냥 개혁론자가 아니라 시스템 개혁론자다. 시장경제가 작동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진짜 개혁이다.”


정치로부터의 ‘경제독립’이 관건

8·7 개각 당시 그의 재경부장관 임명에 대해 재계는 ‘환영’의 뜻을 보였다. 진 장관도 취임후 재계인사들과 만나 ‘협력’을 약속했다.

이 때문에 정-재계에 모처럼 ‘화해기류’가 형성되는 듯 했고, 이를 두고 일각에선 “예상대로 새 경제팀은 재벌개혁의 채찍이 무디다”고 꼬집었다.

이런 시각에 대해서도 진 장관은 펄쩍 뛰고 있다. “대화도 끊고 엄포만 놓으면 개혁이고, 만나서 얘기하면 개혁후퇴인가. 이런 이분법으론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원칙은 반드시 지키되 숨도 고르면서 가는 탄력성은 지켜야 한다.” 진 장관은 “지켜보면 알 것이다. 4대 개혁은 내년 2월말까지 반드시 완수한다”고 ‘개혁전선 이상없음’을 강조했다.

아직은 진 장관에 대해 평가하기 어렵다. 대체로 구조개혁 완료시점으로 잡은 내년 2월께면 그에 대한 중간평가가 나올 전망이다.

누가 뭐래도 지금부터는 ‘정치의 계절’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이력이 말해주듯 진 장관은 ‘정치적 후각’도 매우 발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진 장관의 뛰어난 정치감각이 경제를 거센 정치바람으로 부터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쪽으로 발휘될 지, 아니면 경제정책을 정치적 구미에 맞게 알아서 잘 요리해주는 쪽으로 구사될 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성철 경제부기자

입력시간 2000/08/30 10:42


이성철 경제부 sc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