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23)] 하동(下)

칼의 문화에서 흙의 문화로

동양미술사학자이며 한국미술사연구에 많은 공헌을 한 바 있는 고 존 카터코벨 박사로부터 기행자는 다이토쿠지(大德寺) 소장의 이토 찻그릇의 세속적 가치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1970년을 기준으로 하여 일본의 앤틱 거상 사이에는 이토 찻그릇이 미화로 5,000만 달러를 능가한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세속적 가치 때문에 역설적으로 반세속적인 이토 찻그릇을 발견하려고 우리나라 경남지방의 옛 가마터와 조선시대 분묘들은 도굴꾼들로부터 커다란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리고 너도 나도 앞다투어 이토 찻그릇을 재현하겠다고 하여 전국 도처에 가마터가 생겨 한때는 이토 찻그릇의 증후군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조상의 값진 문화유산이 오늘날 잘못 인식되어 단순한 물신주의(物神主義)에 입각하여 골동적 상품가치로서 돈으로만 평가될 때 아무리 위대한 예술품과 찬란한 문화유산도 결국은 타락하고 만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번 기행에서 깨달게 되었다.

지질학적으로 경상남도 서부지역인 거창, 함양, 산청, 하동은 거대한 도토(陶土)의 밸트를 형성하고 있어 고대로부터 도자기문화가 찬란히 꽃피울 수 있었다.

하동지방에서 굽혀진 오이토(大井戶) 찻그릇은 16세기부터 일본에서 지금까지 최고의 찻그릇으로 숭상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오이토 찻그릇만이 가지는 미적 특성과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당하여 웅휘로운 지리산과 넓은 남해바다와도 같은 장부의 늠름한 기상이 담겨져 있다.

종교적으로는 마치 불교의 선승과도 같은 정적(靜寂)이 있어 일본인은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미의 세계였던 것이다.

이토 찻그릇의 매력은 오랜 세월을 통한 우리 민족의 끈기와 저력있는 생활 속에 배양된 생동하는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다. 이토 찻그릇은 청자백자에서 느낄 수 없는 소박한 멋과 맛을 지니고 있어 토속적이고도 민중적인 조형언어를 표출하고 있다.

특히 비파색의 스산함은 곧 우리나라 남도 시골의 황혼녘의 빛깔 그대로다. 또한 우리나라 민족의 가락인 육자배기나 한오백년에서 느낄 수 있는 낙천적 여유와 해학 등이 찻그릇에 깊이 내재되어 있다.

피의 도륙이 난무하는 전장에서도 이토 찻그릇에 한잔의 차를 맛봄으로써 무사들은 흥분의 세계를 달래기도 하였다. 센노리큐를 위시한 중세 일본 차인들과 무사들은 이토 찻그릇을 통하여 그들의 정신세계를 호전적인 칼의 문화에서 평화지향적인 흙의 문화로 바뀌게 하였다.

하동군 진교면 사기마을 새미골 가마터를 찾아가자면 면소재지에서 청학동 가는 쪽으로 3Km 정도 달리면 마을 어귀에 목장승이 사기마을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의 전국 새마을 시범마을 답게 집들은 잘 정돈되어있고 대숲길로 올라가면 새미골 옛 가마터가 나온다. 이곳의 4군데 무너진 옛 가마터에서 아직도 이토 찻그릇 도편이 출토되고 있다.

1998년부터 정구용 하동군수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인하여 문화마을로 지정이 됐고 아담한 2층 도자기전시관이 건립되어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집념의 도예가 장금정 여사를 중심으로 하여 정웅기씨, 고 박정수씨 가족, 송찬영씨 등이 힘을 합쳐 해마다 이곳 하동 사기마을에서 전국적 규모의 막사발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매년 5월에 개최되는 이 축제는 금년에 벌써 3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를 앞두고 정공채 시인의 싯귀처럼 이토 찻그릇의 문화는 이제 그 고향에서 다시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08/3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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