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끈·끈적' 룸살롱 살아남기 발버둥

테헤란밸리등 벤처위축따라 매출급감

서울 강남의 테헤란밸리 모 컨설팅회사에 다니는 최모(34)씨는 요즘 야릇한 전화에 시달린다. “저희 집에 왜 안오세요”라는 술집 마담의 호객전화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들기 때문.

최씨는 “그 집에 갈 때까지 전화를 걸어댄다”면서 “불과 두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시원찮은 손님'이었다”며 씁쓸해했다. 회사원 조모(37)씨도 “2년전에 간 적이 있는 청담동 모 룸살롱 주인으로부터 지난 주에 5차례나 전화공세를 받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최근 코스닥 시장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벤처기업의 위기감이 테헤란밸리 등 강남 일대 룸살롱과 단란주점으로 불똥이 튀고 있다. `하룻밤에 모 벤처 사장이 1,000만원을 썼다더라'는 술꾼들의 무용담은 이제는 옛말이 됐다.


호객전화 등 손님끌기 안간힘

지난 9월28일 자정 무렵 역삼동 A룸살롱. 예전에는 수일 전에 예약해야 귀퉁이 룸이라도 얻을 수 있는 콧대(?) 높은 업소였지만 이제는 호객꾼인 삐끼까지 뒀다.

이 업소 김모(31) 상무는 “한창인 시간에 20여개 룸의 절반 이상이 비어있다”면서 “몇 달새 세상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근 B룸살롱과 C단란주점도 사정은 마찬가지. B룸살롱 정모(28)부장은 “하루하루 매상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라며 “머지않아 많은 업소들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주인과 마담은 물론 아가씨까지 `생존투쟁'에 나섰다. 낮시간대는 몇 년 전부터 받아놓은 손님 명함을 들춰내 전화호객에 나선다.

접대부 박모(22)씨는 “하루 10명 이상의 손님에게 `잘해드린다'고 유혹한다”면서 “하지만 고객 반응이 과거와 달리 싸늘하다”고 전했다. C단란주점 이모(29) 마담도 “단골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전화공세에 나서지만 신통치 않다”며 “그래도 옛 정을 못잊어 찾아주는 고객이 있어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각 강남역 제일은행 뒤편은 취객보다 많은 호객꾼(삐끼)이 열띤 고객 유치전을 벌이고 있었다.

조모(21)씨는 “최근 우리 업소는 가두 판촉물을 라이터에서 향기나는 콘돔과 레스토랑 할인권 등으로 차별화했다”면서 “화려한 전단물에 예전에는 샐러리맨이 `위치가 어디냐'고 앞다퉈 물어봤지만 요즘은 눈길 하나 안준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인근 식당 앞에서는 소주나 맥주로 1차를 마치고 나온 취객을 상대로 껌과 라이터 등 판촉물을 돌리는 아가씨들이 눈에 띄었다. 아가씨들은 짙은 화장에 짧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았다.

업소 명찰까지 단 김모(22)씨는 “얼마전까지 홍보는 삐끼의 몫이었다”면서 “이제는 업소에서도 가장 잘 나가는 간판급 아가씨까지 직접 거리에 나선다”고 말했다. 김씨는 “특히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이면 모든 종업원이 손님잡기에 동원된다”고 덧붙였다.


모든 종업원의 삐끼화, 개인플레이도

일부 접대부의 경우 따로 살 길을 모색하기도 한다. “업소에만 의지할 수 없다”는 장모(25)씨는 “평소 친했던 손님에게 전화를 걸어 개별적으로 만나 용돈을 탄다”고 귀띔했다.

장씨는 “10대의 원조교제를 생각하면 된다”면서 “업소에는 미안하지만 먹고 살려면 어쩔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대학생 접대부 김모(23)씨는 “일요일을 이용해 시내에서 손님과 만난다”면서 “같이 영화 보고 저녁 먹고 술 한잔 하면서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2차도 간다”고 말했다.

김씨는 “20만원이든 30만원이든 손님이 주는대로 받는다”면서 “술값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고객이 더 원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한 업소 사장은 “일부 아가씨의 배신행위를 알고 있지만 심하지 않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눈 감아주는 편”이라며 “하루에 한 테이블도 못들어가는 날이 허다한데 쉬는 날까지 간섭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강남 고급술집의 이러한 위기감은 이 지역에 밀집된 벤처기업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9월28일 오후 7시 대치동의 인터넷 관련 기업D사. 일을 마친 직원이 하나둘씩 가방을 챙겨 집으로 향한다.

예전에는 흔했던 `한잔 하러 가자'는 말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 회사 신모(37) 부장은 “최근 코스닥 폭락과 함께 회사 주가가 만신창이가 되었다”면서 “전재산이었던 스톡옵션이 거의 휴지조각이 되는 바람에 직원들 인상이 엉망”이라고 전했다.

신 부장은 “연초만 해도 `야, 오늘 500 벌었다. 내가 한번 쏠게'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며 “덕분에 밤마다 술집을 찾았다”고 말했다. 신 부장은 “화장품 냄새(?) 맡아가며 술 마셔본지 한달이 넘었다”면서 “최근에는 회사 인근 식당에서 저녁 먹고 호프집에서 맥주 한잔 하는 게 새로운 회식문화로 정착했다”고 말했다.


술자리 분위기도 삭막

비슷한 시각 역삼동 E사의 직원도 대부분 그냥 퇴근하는 분위기. 이 회사 유모(38) 실장은 “위축된 회사가 가장 먼저 줄이는 게 접대비 아니냐”며 “연초에 비해 공무원이나 거래업체 등과의 술자리가 70% 이상 줄어들었다”고 전했다.

유 실장은 “예전에는 밤12께 야근직원을 사장님이 직접 인솔, 단골 룸살롱에서 수백만원짜리 술자리를 가끔 열었다”면서 “이같은 야간행사도 3~4달 전부터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

업소 관계자들은 “국제유가 폭등도 매출하락에 한몫 했다”고 입을 모았다. 신문 방송 등 매스컴에서 연일 에너지 절약을 외치는 바람에 에너지와 무관한 술소비까지 줄어들었다는 것.

논현동 E룸살롱 김모(40) 사장은 “차량 10부제를 한다느니 경제관련 대책회의를 연다는 등의 경고성 기사들이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니 고객의 심리가 위축되지 않을 수 있겠냐”면서 “매일 술을 즐기는 주당 마저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다”며 언론을 원망했다.

이 업소 접대부 이모(21)씨는 “모처럼 찾아오는 손님의 화제거리 역시 경제”라며 “술자리가 워낙 삭막해 분위기 살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며 고개를 저었다. F단란주점의 한 종업원은 “사장님이 신문을 꼼꼼히 읽는 등 최근 들어 경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며 “기업인이 찾아오면 직접 테이블에 들어가 언제 경기가 풀릴 것 같냐고 물어보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공무원 최모(32)씨는 “주변 시선을 의식한 탓인지 상사들도 고급술집 출입을 자제한다”면서 “이따금씩 들어오는 기업인의 술자리 요청을 거절하는 모습이 종종 목격된다”고 말했다. 최씨는 “이럴 때 잘못 걸리면 끝장 아니냐”며 “경제위기란 말이 매스컴에서 사라질 때까지 이런 분위기는 지속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벤처기업 위축으로 영업에 된서리

현재 역삼동, 대치동 등 테헤란밸리 지역과 청담동, 논현동 등에 위치한 룸살롱과 단란주점은 모두 1,000여개. 이 지역 술집 대부분이 벤처기업과 운명을 함께 할 것이라고 업소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거품이 빠지고 있는 `벤처 신드롬'을 보며 지난해와 올초와 같은 `룸살롱 특수'는 더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지난해 초 강북의 업소를 정리해 재빠르게 이 지역으로 확장이전한 G룸살롱 관계자는 “개업 이래 최대위기를 맞고 있다. 잘못 선택한 것 같다”며 고개를 떨궜다.

“아가씨는 더욱 화끈하게, 마담은 더욱 끈적하게, 웨이터는 더욱 친절하게.” 테헤란밸리 한복판에 자리한 I룸살롱이 최근에 내건 슬로건이였다.

강훈 사회부 기자

입력시간 2000/10/04 18:52


강훈 사회부 hoon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