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으로 읽는 문화와 패션

■패션의 역사 (막스 폰 뵌 지음/한길아트 펴냄)

18세기 말 파리 대혁명의 혼란기. 구체제의 오랜 압박에서 해방된 파리 여성은 오랫동안 박탈되었던 자유의 즐거움에 탐닉하면서 홀딱 벗는 패션을 만들어냈다.

그동안 귀족적이며 권위적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옥죄던 갑갑한 옷을 벗어버리고 본격적 노출 패션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 멋쟁이 여성은 앞을 다투어 코르셋과 두터운 패티코트를 벗어 던지고 속이 비치는 옷으로 자유스런 멋을 과시했다.

심지어 어떤 여성이 가장 조금 입을 수 있는가 하는 경쟁까지 생겨났다. 사람들은 잘 차려 입은 것보다는 잘 벗은 패션을 얘기했으며 사교모임에선 숙녀의 옷 무게를 재는 게임이 인기를 끌었다. 구두와 장신구를 포함해 여자의 옷은 전체 무게가 16로트(약 16g)을 넘어서는 안됐다.

그런가 하면 1801년 독일 하노버에서는 속옷과 스카프만 착용하고 산책을 하면 이긴다는 내기가 벌어졌는가 하면 한 여배우는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발레 공연에서 완전히 나체로 등장하여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패션의 역사'에 소개된 이야기로서 역사의 변천과 패션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 잘 드러내주는 일화다. 당시 파리는 구체제가 무너지고 쟈코뱅당의 폭압정치가 사라지자 사회 곳곳의 자유인 물결이 넘쳤다.

사람들이 가슴 속의 생각을 자유로이 드러내 보이고 자신을 구속하던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던 시기였다. 그 결과 사회, 정치 변화는 사람들의 사고뿐 아니라 외적인 모습에도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때 공화당원은 긴 바지를 입음으로써 자신의 정치적인 신념을 은연중에 표시하기도 했다. 인간의 외적인 표현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옷. 옷 속에는 입는 사람의 생각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상황 등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처럼 패션의 역사는 중세부터 1914년까지 서양의 패션 흐름과 그에 얽힌 인간사를 연구하고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기호로서 패션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독일의 저명한 문화사가이자 비평가인 막스 폰 뵌의 주요 저서 `die mode'의 요약 개정판의 번역본이다.

의상은 역사적으로 유행의 변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실용적 기능을 넘어 인간과 문화의 주요한 징후이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창구가 되어왔다.

패션의 역사는 단순히 패션의 외면적인 변천사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와 로코코의 시대부터 혁명의 시대인 18세기, 산업혁명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에 이르는 유럽 사회 전반의 인간사와 문화사를 펼쳐보인다.

뿐만 아니라 패션이 변하는 과정을 따라가면서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음식, 풍속 등 광범위한 분야를 넘나드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도 빛난다.

그때 그때 유행과 관련해 책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일화는 자칫 따분해지기 쉬운 패션의 역사에 흥미와 활기를 불어넣는다. 가령 아름다운 헤어스타일을 위해 머리에 벌레가 생기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이나 날씬하게 보이려는 유행을 좇아 몸을 졸라맨 끝에 죽음에 이르는 사람과 같은 다양한 일화를 통해 중세와 근대의 인간사를 실감나게 탐험할 수 있다.

또 15세기 남성은 바지에 성기 주머니를 달아 남성미를 과시했다.

이 외에도 가슴을 되도록이면 많이 드러내고 싶어했던 16세기 여성과 속 비치는 옷을 금지했던 교황 인노켄티우스의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신경전, 30년전쟁시 용맹함을 자랑하려고 창칼에 찢긴 누더기를 그냥 입은 데서 유래한 누더기 패션 등 시대의 변화 속에서 패션을 만들어 가는 인간의 모습이 생동감있게 살아 숨쉰다. 다양한 패션과 함께 각국의 풍습이 담겨 있어 풍속사 서적이나 역사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송기희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10/05 10:54


송기희 주간한국부 bara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