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의 악몽 한보철강 어디로…

매각협상 실패, 경제회복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1997년 1월23일, 한보철강이 최종 부도처리됨으로써 충남 아산만에 100여만평 규모로 세워졌던 당진제철소가 침몰했다. 5조원 이상을 쏟아부었던 역사(役事)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보철강의 부도는 당진제철소를 침몰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식회사 대한민국'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한보철강 부도 이후 약 10개월만인 그해 12월3일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자금을 요청한다고 발표했다.

길고도 지난한 IMF체제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과 김영삼 정권의 핵심측근이 청문회에 불려나와 나라 전체가 한보사태로 소란하던 그해 4월까지도 한보 소용돌이가 경제 위기의 서막이 될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2000년 10월 2일, 법정관리에 들어간 한보철강을 인수하겠다며 본계약까지 맺고 막바지 협상을 벌이던 미국의 네이버스 컨소시엄이 계약을 파기한다는 입장을 채권단측에 통보해왔다.

이로써 3년8개월을 끌어오던 한보철강의 매각협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포드사의 대우자동차 인수포기에 이은 한보철강 매각실패는 경제회복의 중대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자아내고 있다. IMF체제 3년차 증후군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일단 채권단은 한보철강은 대우자동차와는 달리 금융권의 추가지원 없이도 다달이 20여억원의 영업이익을 내고 있기 때문에 1~2년 정상가동하면서 천천히 다른 원매자를 찾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부실기업의 가치를 높여 좋은 조건으로 매각만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최소 1년 이상은 악몽의 역사(歷史)를 떨칠 수 없게 됐다.


네이버스, 인수가격 인하 좌절되자 포기

올해 3월 4억8,000만 달러(약5,000억원)에 한보철강을 인수하기로 본계약을 체결했던 네이버스 컨소시엄은 당초 9월30일까지 대금을 납입키로 했지만 10월이 돼도 계약이행을 지연하다 결국 10월2일 최종적으로 계약파기를 통보했다.

주채권기관인 자산관리공사로 보내온 파기문서에는 `매도자의 계약이행 조건이 불만족스럽다'는 이유 밖에 없었다. 당초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해 채권단측은 △법원에서 정리계획안을 승인받고 △미납조세(2,360억원)를 현재가격으로 할인받아 일시납하며 △당진부두 전용사용권을 확보하는 등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네이버스측은 결국 이같은 사항이 만족스럽게 충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을 파기한 것이다.

그러나 자산관리공사 한보인수기획단의 김대성 부장은 “매도자 의무사항은 모두 충족됐으며 이행사항을 계약 종료일까지 네이버스측에 통보했다”며 “단지 트집잡기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자산관리공사측은 도리어 인수가격을 깎으려던 시도가 좌절되자 네이버스측이 포기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김 부장은 “네이버스측이 1억 달러 이상을 깎아달라는 의사를 여러 통로로 내비쳐 왔다”고 말했다.

네이버스 컨소시엄은 연합철강 권철현 전회장의 장남으로 재기를 꿈꾸던 권호성 중후산업 사장이 지난해 미국의 투자회사 네이버스 캐피탈을 끌어들여 구성한 인수단.

권 사장은 당초 네이버스를 끌어들여 한보철강을 인수한 후 직접경영할 목적이었지만 벌처펀드인 네이버스측은 인수후 재매각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동상이몽으로 탄생한 컨소시엄은 네이버스측이 권 사장을 따돌리고 독자적으로 현지법인을 설립한 뒤 올해 3월 본계약을 체결하면서 와해되고 말았다. 네이버스측은 이후로 세계 철강업계를 상대로 인수자를 물색했지만 끝내 적절한 상대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산관리공사 관계자는 “현지법인 설립과 실사에 든 수백만 달러의 비용을 포기하고 계약을 파기한 것은 4억8,000만 달러를 투자해 더 큰 손실을 입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상가동하며 재매각 추진

당진제철소는 A지구의 봉강(철근)공장만 가동중이며 A지구의 열연공장과 B지구의 냉연공장은 가동이 멈추거나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다.

채권단에 따르면 현재 상태로도 올해 3,080억원의 매출액과 월 20여억원의 영업이익이 예상된다. 회사정리 절차에 따라 2002년까지는 연 126억원씩 돌아오는 부채 외에 자금부담이 없기 때문에 금융기관의 추가차입 없이도 경영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때문에 채권단은 정상가동으로 시간을 벌면서 천천히 새로운 인수자를 물색한다는 방향으로 매각계획을 변경했다. 매달 수십억원씩의 신규자금이 필요한 대우자동차와는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급하게 재매각을 추진할 필요가 없다는 것.

채권단의 설명과는 달리 정상가동후 재매각 추진은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네이버스와의 협상이 깨진 마당에 당장 재매각을 위한 입찰이나 수의계약을 추진할 경우 누구도 4억8,000만 달러를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 자산관리공사측도 “지금 당장 판다고 하면 백이면 백 모두 가격을 후려칠 것이 뻔하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의외의 곳에서 실마리가 풀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선 중후산업 권 사장이 재차 도전장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후산업 관계자는 “미국계 보험사로부터 인수자금을 끌어들이는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중”이라며 “조만간 가시적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권 사장은 지난번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컨소시엄 형태가 아닌 인수자금을 차입, 단독인수한다는 계획이다.

이와 관련, 자산관리공사측은 “인수자금이 준비된 사실만 입증된다면 재매각 대상에서 내국인을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라 면서도 권 사장의 계획에 대해서는 “들어보지도 못했고 인수의사를 전달받은 바도 없다”고 잘라말했다.


계약파기 소송, 매각실패 책임 규명 등 남아

채권단은 계약을 파기한 네이버스측에 대해 미 연방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채권단이 매도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음에도 네이버스가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한 것은 계약위반이자 불법행위라는 것이 채권단의 판단이다.

애초에는 소송을 제기할 경우 재매각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신중한 자세로 접근했지만 미국 법률자문사에 문의한 결과 승소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답변을 듣고 강경으로 선회한 것이다.

그러나 한보철강이 법정관리 상태인 관계로 소송제기에는 법원의 인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법원이 소송의 실익을 어떻게 판단할 지가 관건이다.

그러나 이와는 별도로 국내에서는 매각실패에 대한 책임규명과 관련, 한바탕 소란이 불가피한 상태다. 정부는 본계약 체결시 계약파기에 대한 제재조항을 두지 않았다는데 초점을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 주채권은행인 제일은행이 주도했던 매각사무국으로 책임소재가 압축되고 있다. 제일은행으로부터 부실자산을 넘겨받아 주채권 금융기관이 된 자산관리공사는 일단 대상에서 제외되는 분위기지만 공사 내부에서는 문책규명이 재매각에 지장을 줄까 내심 고민하는 모습이다.


한보철강 매각추진 일지

1997. 1.23 최종 부도처리

1997. 7.29 국내업체 대상 1차입찰 응찰자 없어 무산

1997. 8.21 포항제철 등 2조원 인수의향서 제출, 매각방식 문제로 무산

1998. 4.20 국제 경쟁입찰로 변경

1998.12.17 동국제강 3,000억원으로 단독응찰, 가격문제로 유찰

1999. 7.13 네이버스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

2000. 3. 8 네이버스와 본계약 체결

2000.10. 2 네이버스 본계약 파기 통보

김정곤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0/10/11 11:38


김정곤 경제부 kimj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