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민둥산 억새밭

은빛 평원 속에서 추억만들기

강원 정선 땅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민둥산(1,117m)은 산 이름에서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정상 부분이 벗겨져 있다. 나무 한 포기 없는 꼭대기 평원에는 잡초만 바람에 흔들린다. 거대한 왕릉을 보는 느낌이다. 산의 머리가 벗겨진 이유는 나물 때문이다.

정선 지역에서도 특히 이곳에서 산나물이 많이 났기 때문에 옛날부터 매년 한번씩 불을 질렀다. 요즘은 일부러 불을 지르는 일은 없지만 여전히 산나물은 많다. 봄에는 산나물 뜯기 대회가 열릴 정도이다.

계곡물도, 기암도 없는 이 산은 그래서 등반 코스로는 인기가 별로이다. 그러나 가을이 익으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대머리 꼭대기에 끝도 없는 억새밭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경기 포천의 명성산, 전남 장흥의 천관산, 경남 밀양의 사자평과 함께 한반도 4대 억새 군락지로 꼽힌다.

10월8일 현재 억새꽃은 산 정상의 50%만을 덮고 있다. 아직 삼단 같은 고운 대궁을 드러낸 채 때를 기다리고 있는 꽃이 많다. 이번 주말부터 11월 초까지 절정에 이를 전망이다.

민둥산은 산행 코스가 길지 않고, 너덜지대 등 난코스가 없어 가족 나들이에 적격이다. 가장 긴 길을 선택해도 왕복 4시간. 어린아이는 걸리고 젖먹이는 업은 채 산에 오르는 사람도 많다.

산행은 증산역에서 멀지 않은 증산초등학교 옆에서 시작된다. 평탄한 길을 약 40분 걸으면 낙엽송이 빽빽한 가파른 길이 나타난다. 아직 낙엽송의 물은 들지 않았다. 10월 말이면 노란 색으로 갈아입어 보는 맛이 일품이다. 20분을 더 걸으면 발구덕이다.

산 옆구리의 능전마을에서 출발하면 발구덕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 그러나 길이 1차선이라 사람이 많이 몰리는 주말에는 오도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산 아래에 차를 놓고 발로 올라야 시간을 오히려 절약할 수 있다.

정선 지역에는 특이하고 예쁜 지명이 많다. 아우라지, 아살미, 구슬골, 먼저골…. 발구덕도 그 중 하나이다. 발구덕은 여덟개(팔)의 구덩이(구덕)라는 의미이다. 팔구덕에서 발구덕으로 음이 변했다. 이 지역은 어마어마한 석회암지형.

지하수가 땅 밑의 석회암을 녹이면 표면의 땅이 함몰해 구덩이가 된다. 지질학 용어로는 돌리네(Doline)이다. 무심코 지나치면 평범한 능선 같지만 알고 보면 커다란 구덩이가 연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는 흔치 않는 지형이다.

발구덕에서부터 길은 더 가파르다. 갈 지(之)자로 능선을 타고 오른다. 정상을 약 400여m 남겨놓으면 숲을 벗어난다. 길은 거의 직선으로 이어져 있고 길 양쪽으로 억새꽃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민둥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아름답다. 태백산이 코 앞에 있는 듯 우뚝 솟아있고, 연이은 봉우리들이 파도 치는 바다처럼 펼쳐진다. 발 아래로는 증산읍과 동남천이 한 눈에 들어온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억새밭.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억새의 평원은 최고의 가을 추억으로 남기기에 모자람이 없다.

민둥산 주변에는 아름다운 명소가 많다. 정선 소금강의 한 줄기이기 때문이다. 지금 소금강은 단풍이 시작되고 있다. 기암에 붙은 덩굴식물의 잎은 벌써 빨간 색으로 물들었다. 인근의 몰운대, 광대곡, 화암8경 등도 들러볼 만한 곳.

특히 지난 6월 새 단장을 끝내고 다시 문을 연 화암동굴이 매력적이다. 화암동굴은 일제시대에 금광을 캐다가 발견한 석회암 동굴. 금광과 천연동굴을 연계해 국내 최초의 테마동굴로 거듭났다. 금의 생산과 소비 등 금에 대한 모든 것을 동굴 속에 박물관처럼 꾸며놨다. 아이들에게 유익한 동굴이다.

권오현생활과학부 차장

입력시간 2000/10/12 12:53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