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권력의 오만

10월20일 김대중 대통령은 ASEM회의에 참가한 26개국 정상으로부터 노벨평화상 수상과 정상회의 개최에 대한 찬사를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날 고려대의 대통령학 특강에 `깡통'을 준비하지 않고도 강의할 수 있었다. 10월13일 강의하러 갔다가 학생들의 시위에 막혀 우유컵에 배토해야했던 그는 “깡통을 들고라도 강의를 하겠다”고 했었다.

이날 강의에서 김 전 대통령은 한 학생이 “인터넷 여론조사에서 `가장 밥맛 없는 대통령'의 1위가 김영삼으로 돼있다”는 질문에 이렇게 응수했다. “학생을 좋아하는 아가씨도 있고, 되게 미워하는 아가씨도 있는 것 아니요. 독재자가 아닌데 모든 국민의 지지를 바랄 수는 없지요. 날 미워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같은 날 있은 두 장면을 지켜보면서 지난 3월16일자 주간한국의 본칼럼 `YS, DJ그리고 닉슨'이 다시 떠올랐다. 4ㆍ13총선을 앞두고 마치 `투우장'이라고 부를 만한 정치판에서 `정치9단'인 전ㆍ현직 대통령을 비교해본 것이었다.

이 칼럼은 닉슨의 마지막 신세대 보좌관이었던 모니카 크로우리(`Off the Record'의 저자)의 이 같은 결론으로 끝났다.

“닉슨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닉슨은 `위대한 지도자는 탐닉하지 않고 행동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졌다. 그는 이런 신념으로 역사에 자기 업적을 매김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적어도 다음 다음 세대에는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는 내용이었다.

닉슨은 1974년 8월9일 탄핵을 앞두고 스스로 백악관을 떠난 첫 미국 대통령으로 1994년 4월에 81세로 죽었다.

영국 태생이며 BBC 등에서 탐사보도 기자와 특파원을 지낸 저명한 언론인 앤더니 서머스(`조작된 신화-애드가 후버, `마릴린 몬로' 등의 작가)는 닉슨 추적에 나섰다. 그는 `벗은 자와 이긴 자'의 작가 노만 메일러의 도움을 받아 닉슨의 제2분신인 법률고문 존 에리히만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신이 밝히고자 하는 진실을 찾기 힘들 것이다. 닉슨 옹호자들은 알쏭달쏭하게 말하고 결정적 증거는 흩어져 있으며 어떤 것은 깊숙히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손이 이 시대를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확고한 역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서머스는 10월 초에 6년여에 걸친 추적과 1,000여명의 인터뷰 끝에 `권력의 오만-리차드 닉슨의 비밀세계'를 냈다. 닉슨 자신도 3개의 자서전과 5권의 국제관계 및 세계 지도자에 관한 책을 냈다. 그리고 그에 관한 평전은 수백종에 달한다.

640쪽 분량인 `권력의 오만'에는 닉슨의 태어남에서 1974년 8월9일 대통령직 사퇴까지의 일이 너무 시시콜콜하게 그려져 있다. 뉴욕타임스에 서평을 쓰는 영국인 저널리스트인 크리스토퍼 히치슨은 평했다.

“서머스는 여지껏 이루어 놓은 많은 연구들을 잘 마무리했다. 앞으로의 닉슨 연구자들은 모든 것이 연구되어 있어 상당히 곤란을 겪을 것이다.”

앞서 말한 크로우리의 결론인, `닉슨의 바램과는 전연 다른 닉슨의 모습'이 `권력의 오만'에는 상당한 근거를 갖고 나타나 있다. 에리히만은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후일 그의 자손이 그의 조상이 모셨던 닉슨의 모습을 이 책에서 본다면 아마 무척 실망할 것 같다.

서머스는 닉슨이 자란 캘리포니아 위티어 마을에서의 소년시절, 중ㆍ고교 및 대학 시절에서 그의 성격의 전부가 형성된 것으로 분석했다.

대학을 나온 철저한 퀘이커 교도인 어머니, 고등학교 중퇴의 학력을 가진 격정적인 독일ㆍ아일랜드계 아버지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난 닉슨은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에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사랑한 것은 정치요, 정치를 위해서는 투쟁해야 했고 투쟁은 모략일 수도, 음모일 수도 있었다. 금융, 오일, 조직범죄, 그리고 하워드 휴즈 등 재벌과도 손잡아야 했다. 1959년 부통령인 닉슨은 만난 쿠바의 카스트로는 즉각 원조를 바라는 그에게 6개월을 기다리게 하면서 “내 눈을 보지않고 평화를 이야기하는 사기꾼”이라고 했다.

`권력의 오만'이 미국의 다음 세대까지 읽힌다면 닉슨의 `역사에 자리매김'은 어려워진다.

입력시간 2000/10/2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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