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1950년과 2001년 10월22일

그들은 50년전 과는 전연 다른 모습으로 2000년 10월22일에 평양에 왔다. 츠하오티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겸 국방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20여명의 중국 군사대표단이 그랬다.

1950년 10월22일엔 달랐다. 10월 19일 어둠이 깔리자 진눈깨비를 맞으며 압록강 철교를 자동차로 건넌 중국 인민지원군 13병단 부사령원 등화와 참모장 홍슈지는 평북 대유동 남방 3Km 지점인 대동에서 팽더하이 사령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팽 사령관은 이날 안동에서 4개군(군은 우리의 군단 규모) 3개 포병사단에 대해 조선반도에 예정된 작전지구 진입을 명령했다. 병력은 20여만명.

이때 박일우 북한 내무상이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 “출동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울먹였다. 팽 사령원은 “지금 당장 조선에 들어가겠다”며 박과 함께 짚차를 타고 압록강 철교를 건넜다.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를 내세운 마오쩌둥은 팽과 그의 사령부에 21일 세차례나 전문을 내렸다. “13병단(중국인민군 사령부)은 빨리 팽 사령원과 함께 사령부를 설치하고 작전예정지역(평양~원산)에 진입해 기습 선제공격을 가하라. 즉시 답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팽 사령관과 접촉이 되지 않았다. 등 부사령원은 21일 오후에야 대동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으며 22일 오후 2시 골짜기의 한 초가집 3평짜리 방에 함께 있는 팽과 김일성을 만날 수 있었다.

김일성은 등 부사령원에게 “요 며칠새 적들이 쉴새 없이 북진하는 바람에 우리도 철수 하느라 정신없어요. 나도 지금 막 이곳에 왔는데 팽 사령원께서도 때마침 오셨더구만요”라고 말했다.

김일성은 생각보다 여유가 있었다. 중국은 10월 13일 전에 벌써 `입술과 이빨의 관계'인 두 나라를 넘보는 미 제국주의에 맞서 중국을 보전하고 조선을 원조하기 위해 출병을 약속했다. 그건 압록강과 두만강이 한만 국경이 될 수 없으며 북한이라는 완충지역이 있어야 `중국이라는 가정과 국가의 방위가 있다'는 보가위국의 정책이었다.

그래서 김정일의 행방은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한지 2-3주동안 전혀 잡히지 않았다. 평양이 함락된 다음날인 10월20일 김일성은 임시 수도 강계에서 외교사절단을 모셔놓고 오리걸음 군사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그는 기가 꺾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팽 사령관을 수풍댐 별장으로 초치한 뒤 21일에야 그를 만나는 여유를 보였다.

그로부터 50년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무 장관의 방북에 때맞춰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츠하오티엔 국방부장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AFP통신은 “한쪽은 냉전의 해소를”, “한쪽은 순치의 우의 재다짐”을 주장하는 `두가지 방북'이라 표현했다. 또한 중국 국방부장은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을 그림자처럼 밀착 감시하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두 나라 사이에서 그래도 미국쪽에 점수를 따는 것은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실제적이고 실용적이고 탁견이 있고..”의 찬사가 전해졌다.

장쩌민 중국국가주석은 10월25일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지원한 전쟁의 승리는 정의를 수호하고 패권주의에 대항한 영웅적 위업이며 애국주의와 혁명영웅주의의 찬란한 서사시이며, 세계평화와 인류발전을 위해 중국인들이 세운 빛나는 기념비”라고 칭송했다.

과연 중국의 한국전 참전이 `세계평화와 인류발전”의 기념비일까.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 중국은 평화와 화해를 구하는 미국에 대해 패권주의라는 미 제국주의의 50년전 옷을 다시 씌울까.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받은 희생(90여만명 중국 지원군 전사)과 구 소련붕괴후 준 대북한 원조에 대한 영향력이 북-미 화해로 약화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것으로 북경 외교가와 홍콩의 북한 문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과 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군의 통일후 한반도 주둔을 인정 또는 양해할 경우, 그들이 염려하는 미국과의 압록, 두만강에서 국경선은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2개의 한국 정책'은 `2개의 중국정책'과 연계된다. 그래서 홍콩에서는 빌 클린턴 미대통령의 방북전에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평양을 찾을 것이라는 소문이 높다.

<박용배 세종대 겸임교수 >

입력시간 2000/10/3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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