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게이트] 벤처, 사채, 그리고 검은 커넥션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압구정동에 있는 인터넷 벤처기업 C사의 임모 이사는 정현준-이경자 사건의 본질을 이렇게 규정했다. 미래 성장산업을 지향하는 벤처기업이 `단기투자-고수익'의 성향을 지닌 사채자금과 손을 잡은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기업운영이라는 뜻이다.

그는 “아이디어와 기술력, 젊음에 승부를 거는 벤처기업은 실패하면 맨주먹으로 돌아가는데 빈손을 용납지 않는 사채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면서 “벤처열풍 속에 무성한 소문을 낳았던 검은 커넥션의 결말은 이미 예정돼 있었던 것”이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아예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사채와 벤처가 어떻게 손을 잡았을까. 지난 2월 벤처붐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S대학의 모 교수와 만난 자리에서 사채자금의 벤처 투자가 대화에 올랐다.

그 교수는 “좋은 일 아닙니까. 어차피 사채라는 건 지하에 묻혀 있는 음성자금인데 벤처투자로 양성화하면 모두 이득이지 않습니까”라고 사채 긍정론을 폈다. 동석했던 한 벤처기업가는 “그런데 교수님, 사채라는 돈의 성격이 워낙 포악해서 언제 분탕질을 칠지도 모르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제자인 그가 내놓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벤처기업이 스스로 수익을 내기 전에 포악한 사채자금이 들어오면 뻥튀기하면서 돌고돌다가 누군가가 왕창 물리는 제로섬 게임이 될텐데 그 후유증은 심각해진다”는 우려였다.


급속도로 벤처에 쏠린 사채자금

기업경영에서 `지하자금', `검은 돈'으로 경원시돼온 사채자금은 벤처 흥국론자(興國論者)들과 벤처붐에 집착한 정부, 대박 꿈에 젖어있던 벤처기업가 등의 3각지원 속에서 급속도로 벤처타운 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사채 유입 단계는 보통 3 단계로 구분된다.

어음 할인이 매개가 된 사채업자와 벤처 기업인의 만남이 첫단계. IMF체제 시절 부도위기까지 몰렸던 S시스템의 한 직원은 “98년 여름에 견디다 못해 사채시장에 어음을 갖고 나갔다”면서 “그나마 아는 사람이 없었다면 와리깡(할인)도 못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때만 해도 벤처기업의 어음은 사실상 휴지조각. 그야말로 사채이자를 줘야하는 마지막 선택을 했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정현준 사장과 이경자 부회장의 첫 만남도 이 과정에서 이뤄졌다. 대략 1998년3월로 알려졌다.

두번째 단계는 사채업자들이 잘 나가는 벤처기업을 찾아다니며 투자한 시절. 1998년 하반기 이후 저금리 기조가 자리잡자 발빠른 명동 사채업자들은 수익원을 찾아 벤처시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주식시세판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프리코스닥(코스닥 등록 직전 기업)의 주식을 사들여 등록 후 수십배로 뻥튀기한다는 이야기가 명동과 강남 사채시장에 나돌았다.

명동에서 4년째 기업 어음을 중개해온 C씨는 “코스닥 시장에서 10배, 20배 튀겼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돈냄새를 맡는 꾼들의 코는 다르구나 생각하며 부러워했다.

그때 문제가 된 평창(정보통신)과 S, L, K 기업이 최고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부실기업 퇴출이다, 정현준 사건이다 하면서 이 바닥이 완전히 얼어붙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때 손을 안대기 잘했다”고 다행스러워했다.


큰 손들의 머니게임

프리코스닥 투자는 전문꾼들이 조직한 사설펀드에 사채자금이 들어가면서 지난해 하반기에 절정을 이뤘다.

일부 큰 전주들은 꾼을 모아 스스로 사설펀드를 만들기도 하고 증권회사 출신을 고용해 장외시장을 운영하는 등 머니게임에 뛰어들었다. 또 종합금융, 신용금고와 같은 제도권 금융기관과 결탁, 엔젤조합을 결성해 기업인수를 시도하기도 했다.

장외기업을 선정해 “무조건 코스닥에 상장시켜줄테니 시키는 대로 하라”고 큰 소리친 전주도 적지않았다고 한다.

또 개미자금이 가세하면서 사설펀드는 M&A를 겨냥한 부띠크로 확산되는데 사채자금은 상당한 곳에서 종자돈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 일간지 증권담당 기자는 “많을 때 테헤란로에는 200여개의 부띠크가 열렸는데 작은 데가 100억원 규모였다. 최소 2조원 이상이 이런 식으로 유통됐다”고 말했다.

잘 나가던 벤처투자가 주춤하면서 사채자금의 분탕질이 시작됐다.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A벤처기업은 최근 사채 때문에 문을 닫았다. 계약서 한 장이 문제였다.

공모형식으로 사채업자로부터 투자를 받은 A기업 사장은 시장이 불투명해진 뒤 사채업자로부터 돈 독촉이 심해지자 견디다 못해 터뜨려버린(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증권회사 객장에서 전문 투자상담원으로 일하는 L씨는 “출처가 불분명한 돈은 항상 계약서 한장만 있다.

사설 펀드 가입이든, 벤처 직접 투자든, 당사자끼리 계약을 맺어 누가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는 게 그 바닥 생리다. 들리는 바로는 월 몇% 수익을 보장하되 잘못되어도 원금은 보장한다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물론 벤처기업이 펀딩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는 점에서 사채 유입의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다. 담보도 없고, 기술력에 따른 성장성 하나만 가진 벤처기업이 제도금융권의 투자를 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채라는 돈의 성격이다.

사설펀드든 장외시장이든 사채는 몇개월 단위로 굴려가야 하는 자금이다. C씨는 "사채업자들은 자기 돈으로 어떤 기업의 주식을 사 A에게 1만원에 판 뒤 곧 다른 사람(B)에게 1만5,000원에 팔아주겠다고 유혹하고 B에게는 다시 그 주식을 2만원에 다른 사람(C)에게 팔아주겠다는 식으로 `뻥튀기 돌리기'를 해왔다”면서 “사채자금은 돌다가 멈춰서면 뭔 일이 터져도 터지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사채 10조원이상 벤처로 유입

지금까지 벤처기업쪽으로 들어온 사채 자금은 10조원 이상. 그러나 상당한 자금이 코스닥 폭락과 장외시장의 스톱으로 더이상 굴러가지 못하고 묶여 있다고 한다.

L씨는 “계속 굴러가야 하는 자금인데 묶여 있으니 사채업자들이 벤처기업가만 들볶고 있다”면서 “사채업자들과 벤처기업가 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게임이 앞으로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규모가 작은 벤처라면 터뜨린 뒤 아예 손을 털어 버리면 되지만 큰 벤처는 그럴 수가 없어 벤처 자금시장의 회오리 바람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그의 관측이다.

사채와 벤처의 잘못된 만남과는 무관한 벤처기업인의 항의 목소리도 높다.

한 벤처기업인은 “코스닥시장이 달아올랐을 때 사설펀드가 판쳤다는 건 증권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라면서 “정현준이 무슨 벤처기업인이냐. 사채자금으로 머니게임을 일삼은 벤처사냥꾼에 불과하다”며 그를 벤처인으로 보는 시각을 못마땅해했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0/10/31 21:48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