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게이트] '몰락'부른 벤처사업가의 과욕

정현준-이경자 불법대출사건, 비리

벤처재벌을 꿈꾼 한 벤처 사업가의 욕심이 전국을 `벤처게이트'의 소용돌이로 빠뜨렸다.

서울 동방 및 인천 대신상호신용금고 불법대출 사건으로 불거진 금융사고는 금융감독원(금감원)의 감독 부재에서 비롯됐지만 정현준(32) 한국디지탈라인(KDL) 사장의 과욕이 부른 화(禍)라는 게 정설이다.

물론 불법대출 과정에서 핵심역할을 하고 금감원에 청탁성 로비전을 펼친 것은 동방금고 이경자(56) 부회장으로 드러났지만 정사장이 코스닥 활황기에 주식을 담보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지만 않았어도 그 싹이 트지 않았다는 것.

당시엔 숱한 벤처기업가들이 현금 없이 주식으로 `부자행세'를 한 경우가 많아 `제2, 제3의 정현준'에 대한 괴담이 나도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패한 벤처인과 사채업자의 속셈

정사장은 벤처업계에서 기업인수ㆍ합병(M&A)의 귀재로 알려져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직후인 1995년부터 프론티어M&A, 프라임M&A, 한스글로벌M&A 등 줄곧 M&A 관련 업체에서 기반을 닦았고 실제 KDL, 디지탈임팩트, 평창정보통신 등 유망 벤처기업을 포함, 20여개 업체를 인수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올해 7월 KDL 대표에 취임하고 자회사들을 묶는 지주회사로 디지털홀딩스를 설립하려는 과정에서 일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평창정보통신의 코스닥행이 늦어지자 주주들의 피해를 보상한다며 50만주를 시가보다 2배 높은 주당 1만5,000원에 공개매수를 추진했지만 증시침체로 유동성이 묶이면서 대금을 치르지 못하게 됐다.

더욱이 공개매수한 주식을 은행에 담보로 제공하고 계열사 지원에 사용한 점이 알려지면서 법정소송으로 비화했고 지주회사 설립의 꿈도 무산됐다. 문어발식 확장의 과욕은 결국 `실패한 벤처인'으로 마감했다.

정사장의 실패는 사채업자인 이 부회장과 만나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루한 차림의 정사장이 찾아와 애걸하는 통에 3억여 원을 할인해 줬다.” 이부회장이 1998년 정사장을 만날 당시를 회고한 말이다.

이부회장은 당시 금융사기사건으로 논란이 됐던 `파이낸스업'을 하던 사채업자로 “젊은 나이의 정사장이 의욕적으로 사업을 벌이는 데 이끌렸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거래는 급속도로 진전돼 지난해 2월 대신금고를 인수하고 10월에는 태평양 그룹의 동방금고를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금고 인수에는 두 사람의 자금도 들어갔지만 개인투자자들이 H증권 투자상담사인 권오승(45)씨에게 맡긴 180억원도 사용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부회장은 정사장을 만날 당시부터 제도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채업을 포기하고 제도권 금융업에 진출하기를 갈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부회장의 속셈을 딴 데 있었다. 차명계좌 등을 통해 불법대출한 돈으로 법적 테두리내에서 자신의 본업인 사채놀이를 계속해 나간 것이다.


교차대출방법 동원, 광범위한 로비

금감원의 조사 결과, 정사장과 이부회장은 온갖 방법을 이용해 자신들의 곳간에서 `단물'을 빼먹은 것으로 드러났다. 금고법상 2%이상의 대주주에 대한 대출은 `출자자 대출'로 간주돼 엄격히 금지돼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신과 동방금고에서 불법대출한 자금은 모두 637억원. 대출자금의 최종 기착지를 숨기기 위해 23개의 차명계좌를 이용했고 해동과 한신 등 다른 금고까지 끌어들이는 교차대출 방법까지 동원했다.

차명계좌 활용 수법은 고전적 수법이지만 교차대출 방식은 이번에 처음 드러난 수법이다. 해동과 한신금고의 출자자와 짜고 대출액을 서로 교환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누가 주도했는가다. 자금의 사용처 및 용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사건이 불거진 이후 서로 상대방의 소행이라고 지리한 폭로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검찰의 조사 결과, 이부회장과 정사장이 각각 430억원, 120억원씩 모두 550억원을 빼낸 것으로 확인됐다. 금감원의 발표와는 87억원의 차이가 나는 셈인데 일단 이 액수는 교차대출 관련 부분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결국 이 부회장이 사채놀이 등 개인용도로 상당액수를 빼돌린 것으로 보인다. 또 금감원 등 정ㆍ관계 로비에도 적잖은 불법자금이 흘러 들어갔을 것으로 보고 검찰은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불법로비는 금감원 비은행검사1국장을 지낸 장래찬(52)씨를 상대로 한 3억5,000여만원이 전부다.

현재 금융연수원에서 연수중인 장국장은 금고검사 업무를 담당하는 비은행검사1국장에 재직하면서 정사장이 설립한 평창정보통신 사설펀드에 3억5,000여만원을 맡기고 주가가 폭락하자 주식을 돌려주고 원금을 전액 보전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3년7개월 동안 동방금고에 대한 검사가 단 한번도 진행된 적이 없고 대신금고의 조사에서도 묵인 의혹이 벌어지는 등 금감원 임직원이 추가로 로비전에 휘말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 정사장이 줄기차게 “이부회장이 40억원을 로비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주장, 검찰은 금감원 이외에도 정치권 등으로 `검은돈'이 흘러갔는 지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로비도구로 사용된 사설펀드, 금감원이미지 실추

장국장이 개입된 부분은 금고 비리를 묵인하는 대가로 사설펀드에 들어간 투자금의 원금을 보전받았다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바로는 정사장이 만든 사설펀드는 10개 안팎으로 총액만도 7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증시가 활황을 보이면서 정ㆍ관계 인사들도 돈보따리를 싸들고 재테크 차원에서 사설펀드에 줄을 섰다는 게 업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설펀드는 재테크의 주요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정사장의 경우에서 보듯 `대 권력 로비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 셈이다.

이와 관련, 검찰은 정씨의 사설펀드에 자금을 맡긴 고위급 인사들의 명단을 파악중이다.

이번 사건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금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장국장의 비리가 밝혀졌고 장국장 윗선의 연루여부에 따라서는 이번 사건이 더욱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대신과 동방금고의 검사과정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금감원은 사건의 핵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동방금고 유조웅(56) 사장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요청하지 않아 유사장이 로비와 관련된 핵심적인 물증을 싸들고 미국으로 도망가도록 방조했다는 따가운 시선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연말을 기한으로 진행중인 기업과 금융권의 구조조정 작업이 이번 사건으로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데다 대국민 신뢰가 추락한 것이 더 큰 문제다. 벌써부터 금감원의 개혁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기업과 금융기관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피바람을 일으키던 서슬푸른 금감원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느낌이다.

경제부 김정곤기자

입력시간 2000/10/31 21:52


경제부 김정곤 kimj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