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분신 30주기] 암울한 현실과 바꾼 22세 청춘의 희망

민주·노동운동의 촉매제 된 전태일 분신, 30년전과 지금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전태일 평전)

1971년 11월13일, 서울 동대문구 청계6가 평화시장 구름다리 앞길에서 불덩이 하나가 펄펄 뛰며 타올랐다. 성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하루 뒤 사망. 노동자 전태일은 그렇게 죽었다. 22세, 본적 대구시 삼덕동 149, 현주소 서울 성북구 쌍문동 208, 어머니 및 2남2녀의 장남, 직업 재단사, 혈액형 O형, 키 161cm.


분신은 그에게 마지막 저항수단

11월13일로 전태일 분신 30주년을 맞았다. 살아있다면 그의 나이는 52세. 하지만 그는 여전히 22세의 청년으로, 그의 유서처럼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왔다.

그와 그가 분신했던 장소는 아직도 평화시장 사람에게 기억되고 있다. 30여년간 평화시장을 떠돈 한 지겟꾼(50)의 이야기. “바로 여기서 불을 질렀다. 사람들이 달려가 옷으로 덮어 불을 껐는데 다음날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벌써 30년이 지났군.”

분신하기 직전 전태일은 동료들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고 있었다. 근로기준법과 자신을 함께 불질러버린 것이다. 그는 왜, 무엇을 위해 죽었을까.

당시 노동자들의 상황을 보자. 1970년 전산업 노동자 평균 월임금은 1만7,831원. 노조가 제시한 최저생계비의 61.5% 수준이었다.

평균 노동시간은 주당 51.6시간이고 제조업 분야는 53.4시간이었다. 한해 동안 산업재해자수는 3만7,752명에 달해 노동자 100명당 4.9명 꼴이었다. 정부통계에 따르면 1970년 한해 사용자측에 의한 각종 노동자 권리침해는 2만1,286건이었다.

전태일이 1964년부터 일했던 청계천 평화시장 일대 피복공장은 1960~1970년대 최악의 노동조건을 갖고 있었다.

남녀 공원이 식사와 수면시간을 제외하고는 소음과 먼지로 뒤덮힌 높이 1.5m의 공장(속칭 다락방)에서 허리도 펴지못한 채 혹사당했다. 아침 8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고 지친 몸으로 기어드는 잠자리에서는 십여명이 칼잠을 자야했다.

전태일이 1970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단사의 100%, 미싱사의 90%가 신경통과 신경성 소화불량을 갖고 있었다. 전태일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그에게 근로기준법은 이같은 착취를 정당화하는 법률이었다.

평화시장의 경험은 초등학교 중퇴 학력인 전태일을 의식화하고 변혁주의자로 만들었다. 그가 애초부터 분신자살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1969년 평화시장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실태 설문조사와 관계기관에 대한 진정을 진행했다. 바보회의 투쟁단체인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다락방 철폐와 노조결정 지원 요구, 근로조건 개선 시위를 시도했다.

하지만 사용자측과 정부는 철벽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스스로 노동권익을 보장하는 기업을 세울 계획을 짜기도 했다. 분신은 그에게 마지막 남은 저항수단이었다.


전태일시대와 지금, 뭐가 다른가

전태일의 죽음은 IMF체제에 이어 또다시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현재의 상황에 무엇을 시사할까. 정경유착과 재벌의 독점, 저임금 착취에 기반해 기술개발을 등한히 한 산업구조와 오늘날의 경제위기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까.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 피복공장은 1980년대부터 창신동 일대로 밀려났다. 전태일 기념사업회의 이명숙 사무국장에 따르면 현재 창신동 일대의 피복공장의 노동조건은 전태일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97~1998년 조사에 따르면 창신 1ㆍ2동의 피복공장은 2,000여개. 대부분 종업원 20명 미만이다. 하루 12시간 노동에 시다는 50만~60만원, 미싱사는 100만~12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전태일 장례식 3일후 만들어진 최초의 민주노조 `청계피복노조'는 아직 이곳에 남아있다. 과거 노조원이 수천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300여명에 불과하다. 사업장이 영세하고 분산된 데다 외국인 고용이 늘어 노동자의 결집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장기표 신문명정치연구소장은 “전태일의 분신이 민주ㆍ노동운동의 촉매제였다”고 말했다.

학생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 노ㆍ학연대 투쟁을 촉발시켰다는 이야기다. 장씨는 전태일이 성인(聖人)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사회구조를 통렬히 비판하고 인간해방 투쟁을 벌였으며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전태일의 사상을 `인간해방이 실현되는 사회, 민중주체, 사회개혁 사상'이라고 정의했다.

한국의 대표적 보수적 모임인 자유민주민족회의 이철승 총재도 전태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 총재의 이야기. “전태일의 분신은 근대화 과정의 문제점에 대한 저항이자 노동운동에 불을 지른 사건이다. 그는 독재와 배고픔에 대한 항거로 살신성인함으로써 역사에 기여했다. 이 사건은 많은 위정자에게 정문일침의 계기가 된다.”

전태일 기념사업회와 민주노총(www.nodong.org)은 공동으로 10월23일부터 11월13일까지 전태일 30주기 추모 및 기념주간사업을 벌이고 있다.

11월4일 그의 분신장소 옆 인도상에는 추모사가 세겨진 가로 40cm, 세로 30cm의 기념동판이 설치됐다. 동판에는 `이곳은 영원한 노동자의 벗 전태일이 1970년 11월13일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분신 항거한 곳입니다'라고 써있다.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0/11/07 16:30


배연해 주간한국부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