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기행기…2000년 가을, 북한의 현주소

주변에 거대한 유적지가 즐비한 10차선 도로 `청년영웅거리'는 북한의 수도 평양의 자랑이다.

수십만명의 젊은 일꾼이 동원된 이 도로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기 2주일전쯤에 완공됐다.

평양에서 오래 산 한 소식통은 “매일 밤 망치를 들고 공사현장으로 모여드는 새까만 아이들의 대열을 볼 수 있었다”면서 “그러나 도로엔 이미 균열이 생기고 있다”고 전한다.


생명력없는 거대한 시설, 깨끗한 도로

북한 사람들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등 미국 손님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나름대로 최고의 행사를 벌였고 어두운 도시에 불을 훤히 켰으며 현안 해결을 위한 길을 닦았다.

그러나 북한은 `청년영웅도로'와 같이 이미 금이 가고 있는 사회다.

평양은 전지전능한 한 독재자의 왜곡된 유토피아를 찍기 위한 영화 세트와 같다. 거대한 스포츠 시 설과 아파트 단지는 깨끗하고 널찍한 길을 따라 세워져 있다. 여성 브라스밴드는 일꾼을 독려하기 위해 혁명가를 연주하고, 벽에는 컬러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하자'는 선전구호가 새겨져 있다.

`노동자의 천국'인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빠진 것은 바로 생명력. 무려 200만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이 도시의 빌딩은 텅텅 비어있고 공장은 제품생산에 필요한 전력과 연료가 모자라 낮잠자고 있다. 거리에는 한방울의 기름도 없다.

교차로 중간에 있는 스탠드 위에 선, 푸른 제복의 여경은 기계적으로 경찰봉을 움직이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완전히 꺼진 신호등을 대신해 교통흐름을 통제하는 것이지만 거리에는 교통순경과 보행자 따위는 무시하고 속도를 내는 군용 차량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북한은 10년전 소련으로부터 지원이 끊긴 뒤 모든 것이 `일시정지' 상태로 들어갔다. 지하철로 변한 방공호로 들어서면 소비에트 시절 동유럽의 잊혀진 유물을 보는 듯 하다.

실제로 동독에서 온 전동차에는 10년이나 지난 낙서와 베를린 지도가 아직도 남아 있다. 새로 추가된 것이라곤 눈에 익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과 그의 아들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의 초상화뿐이다. 그나마도 전기가 나가면 종종 그런 일이 일어나지만 그들은 몇시간이고 깜깜한 전동차 안에서 기다린다.

도로를 가로질러 서 있는 평양의 제1백화점에는 선반마다 먼지를 뒤집어쓴 양철 컵과 장난감 탱크, 촌스런 단색의 고무장화 등이 똑같이 놓여 있다.

몇몇 초등학생이 플라스틱 향수병을 힐끔거리며 복도를 서성거리지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간에 에스컬레이트가 설치돼 있는 이 층에는 단하나의 형광전등이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을 뿐이다.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

그렇다면 모두들 어디에 가 있을까? 모두들 살아 남기 위해 바쁘다. 도시를 빠져나가는 도로에는 숱한 남자 여자들이 보자기에 싼 야채 보퉁이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걷고 있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친척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기 위해 수백마일을 마다 않고 걷는다. 몇몇 무리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나뭇잎으로 피운 모닥불 주변에 둘러 서 있다. 겨울이 되면 도로 빙판 제거 작업에 수천명의 여자와 아이가 동원된다.

이들에게는 맨손뿐이다. 지금은 나이가 지긋한 여자들이 도로를 청소하면서 곡식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면서 떨어뜨린 낟알을 줍고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 몰아닥친 기근으로 수십만명이 사망했다. 주로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를 북한땅에 배분하는 세계식량계획(WFP)은 현재 북한 전체 인구의 3분의1에 해당하는 800만명을 먹여 살리고 있다.

문제는 식량 뿐만 아니라 희망의 상실이다.

“북한 사람들은 큰 좌절감에 빠져 있다. 그들에게는 미래도 없고 이상도 없으며 살아갈 희망마저 없다”고 독일의 의료지원그룹 `캡 아나무르'소속 외과의사 노베르트 볼레르센은 말한다. 그는 북한에서 1년6개월째 살고 있는데 “그들은 내내 기다린다. 그것은 마치 구세주를 기다리는 모습과 다름없다”고 덧붙였다.

별달리 할 일이 없는 북한 사람은 질 나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며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50대에 위나 간암으로 죽어간다. 도심에는 노인네나 장애인을 볼 수 없다.

아예 젊을 때 죽기 때문이다. 외과수술도 난방이 안된 냉방에서 마취도 안한 채 촛불 아래서 이뤄진다. 이 나라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대학병원조차 링거병 대신에 빈 맥주병이 사용된다. 여성은 자녀를 한두명 외에는 더 키울 능력이 없어 낙태수술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지만 피임도구는 여전히 부족하기만 하다.


무한한 경제적 잠재력 보유

지도층은 북한의 국가체제를 바꿔야만 할 동기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폐쇄된 지역에서 주변에는 잔디가 깔리고 담쟁이 덩굴로 덮인 건물에서 살고 있다. 오락거리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골프장도, 볼링장도 있다.

모두 달러만 통용되는 곳인데 골프장은 일본의 유명 건축가가 설계하고 만들었다고 한다. 평양에서 사는 한 외국인은 “축제기간중에 문화궁전 앞 주차장에는 최신형 메르세데스-벤츠들로 바다를 이룬다"고 말한다.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전세계에서 온 외교관을 대하듯이 이 나라를 개방시킬 의도를 갖고 있을까. 또 외국인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쭈삣쭈삣하는 사람의 나라로 만든 종래의 쇄국정책을 스스로 풀 것인가.

지난 반세기 동안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숭배하며 살아온 북한 사람이 `북한 세트'의 밖을 내다보게 되면, 또 단단한 장벽으로 막아놓은 남쪽과의 경계선을 넘어 부자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현재로서는 김정일의 움직임이 신중하고 제한적이다. 그러나 그가 단단하고 스탈린식 국가통제체제를 완화하고 국가의 전체 에너지를 생산부문으로 유도한다면 이 나라는 거대한 경제적 잠재력을 내보일 것이라고 일부 전문가들은 말한다.

한 서방 외교관은 “누군가 그 버튼을 누른다면 1970년대 후반의 중국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면서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이 좀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0/11/0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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