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남북 영화교류와 나운규

11월4일 한국영화학회는 2000년 추계 세미나를 열었다. 주제는 북한영화 연구. `북한영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어떻게 교류해야 하는가, 그리고 멀리 보면 통일후 한국영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까지 생각하고 토론하자는 자리였다.

남북화해와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면서 영화도 당연히 그 분위기를 탔다. 더구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누군가. 영화광이고, 직접 제작까지 해봤던 인물이 아닌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서도 한국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할 정도였으니.

구체적 협의도 없이 당장 북한에 가서 촬영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나왔고, 북한영화 `불가사리' 가 국내에 개봉했고, 우리 영화 4편이 `선물'로 전달됐다. 방송은 연일 “북한의 애니메이션은 세계적 수준”이라며 “당장이라고 우리와 합작해도 문제가 없다”고 떠들었다.

11월3일에는 `공동경비구역 JSA' 가 공식적으로 북한에 가는 것을 정부가 허용했으니 이제 공연만큼이나 영화도 남북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야말로 너무나 피상적인 정치 쇼다. 아직 남북한 영화인이 만난 적도, 남북영화에 대한 얘기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행위가 아닌 영화교류는 아직 시작도 못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남북 영화교류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 해답의 하나로 조희문 교수(상명대)는 나운규를 이야기한다. 그가 나운규 연구로 국내 최초로 영화학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나운규야말로 어쩌면 50년을 전혀 다른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남북한의 유일한 동질성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이 발견된 것은 최근이다. 조 교수는 지난해 평양출판사가 발행한 `라운규와 수난기' 가 자신의 저서 `위대한 한국인-나운규'(한길사, 1997년)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을 발견했다. 이 책은 자신들이 추구했던 기존의 시각을 상당부분 수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지금가지 나운규를 어떻게 평가하고 정의했을까. 조 교수는 `나운규 연구의 남북한 비교연구'란 주제발표에서 1961년 강호가 쓴 `라운규와 그의 영화'란 책을 인용해 이렇게 요약했다.

“라운규의 영화들은 인민성과 진보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유는 일제 강점하의 사회제도 모순과 불합리성에 대한 증오심을 반영하고 그 제도를 부정하며 민족적 멸시와 식민지적 억압과 착취, 빈궁과 무권리에 허덕이는 인민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침략과 착취를 반대하는 타협없는 투쟁에서만 민족적 자유와 계급적 해방을 쟁취할수 있다는 굳은 신념에서 인민을 원쑤의 적극적인 투쟁의 길에로 고무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운규의 영화 `풍운아', `임자없는 나룻배', `사랑을 찾아서'에 나타나는 저항성과 계급투쟁을 강조하며 나운규 영화의 혁명적 의의를 과장왜곡해 부각하고 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조 교수는 “우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해방이후 나온 나운규에 대한 평가는 대개 몇 가지로 요약된다. 우리 영화의 개척자적 공로, 천재적 위대함, 투철한 민족사적 의식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영일씨의 경우 그의 부친이 누구보다 투철한 민족의식과 시대적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운규 역시 그 부모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는 동안 남다른 민족의 식을 갖추었다는 식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동안 나운규는 자신의 실체와 상관없이 멋대로 각색되고 영웅화했다는 애기다. 그것은 남한도,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조 교수는 그 틀에서 벗어나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나운규의 실체를 조명하려 했다.

그는 기존의 나운규 신화에서 벗어나 한국에 영화가 도입, 정착하는 과정에서 영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지지를 광범위하게 향상시킨 대중적 스타의 측면에서 그를 해석했다.

조 교수는 이를 “영웅적 신화에서 현실적 인간으로의 전환”이라고 했고, 이같은 전환은 북한도 받아들이고 있음을 북한 책이 자신의 저서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서 증명된다고 했다.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긍정하지 않더라도, 또 북한이 여전히 나운규를 혁명적 영화인으로 생각하더라도 하나만은 분명하다.

남한도, 북한도 모두 나운규를 `위대한 영화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남북영화가 찾은 첫 동질성일 수도 있다. 그 동질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교류란 단번에 `내 것 반, 네 것 반'의 식으로 나누는 것으로는 될 수 없다.

이대현 문화부 차장

입력시간 2000/11/0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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