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민주주의 힘이란?

1,776표에서 327표로, 6,825표에서 17표로. 선거가 끝난지 닷새가 지나도록 미국이 대통령 당선자를 결정하기는 커녕 자꾸만 수렁으로 빠져드는 숫자상의 이유다.

플로리다주에서 1,776표 앞섰던 조지 부시가 재검표에서는 고작 327표 이긴 것으로 나왔고, 뉴멕시코주에서는 앨 고어에게 6,825표 뒤졌다가 거꾸로 17표나 앞선 것이다.

'민주주의의 교과서'로 꼽히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다. 컴퓨터에 의한 개표이니 '틀릴 수가 없다'는 선입관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래서 고어 진영은 수작업에 의한 개표를 요구했는데 부시 진영에선 수작업 개표가 더 정확하지 않다고 금지신청을 법원에 냈다. 앞으로 법정공방이 불가피하다.

두 사람의 운명이 걸린 플로리다주의 327표는 주 전체 유권자의 0.005%에 불과하다. 미국 전체의 유권자가 던진 1억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실상 무승부다.

'세계의 최고 권력자'를 뽑는 선거가 무승부로 끝났다면 후보자끼리 '자리다툼'이 없을 순 없을 것이다. 일부 언론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법정 투쟁이나 설전, 피켓 시위 등이 그런 현상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 같았으면 이미 '피가 튀었을' 현장에서 지지세력간에 충돌이 있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앞으로도 듣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부시 후보의 동생인 젭 플로리다 주지사가 공정한 선거관리를 위해 선관위원장직에서 사퇴하고 클린턴 대통령은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그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다.

양 후보 진영은 전국에서 지지자를 동원하는, 소위 '세과시'보다는 공정한 법률적 판단에 맡기는 편을 택했다.

언론도 "아무리 표차가 적더라도 패자는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모든 당사자들이 공정한 '게임의 룰'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느낌이다. 이게 바로 미국의 저력이고, 민주주의의 힘이 아닐까?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0/11/1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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