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경비구역 JSA] 한 울타리 두 체제… '침묵의 땅'

북한땅으로 넘어왔다.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간단히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창밖에서 오른쪽 허리에 권총을 찬 인민군 경비병이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인민군복 상의의 단추는 금색으로 다섯개. 왼쪽 가슴엔 김일성 배지, 오른쪽 가슴엔 부대마크가 선명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 JSA에서도 가장 심장부인 군사정전위 본회의장(일명 T2) 내부는 남북한 군사분계선의 효력이 소멸된 곳이다. 건물의 절반은 남한땅, 절반은 북한땅이지만 쌍방의 약정에 따라 내부만은 자유지대가 됐다.


철책선 대신 마이크선이 갈라놓은 남북

남북으로 10m, 동서로 5m 가량의 장방형인 T2 건물 안쪽에는 분단의 벽이 없다. 유일한 경계선은 정전위 회담테이블 위에 동서로 가느다랗게 뻗어있는 마이크 선에 불과하다. 동서에서 달려온 155마일 철책선이 여기서는 마이크 선으로 변하면서 분단을 해체하고 있다.

일단 T2 내부에 들어서면 누구도 마이크 선을 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물론 남측에서 T2로 들어간 사람이 북쪽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안된다. 북쪽 출구 문 앞에는 선글래스를 낀 남측 경비병 2명이 태권도의 기마자세로 버티고 서있다.

T2 건물은 '약속의 힘'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남북 쌍방의 약속에 의해 T2 내부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됐다.

남측이 그렇듯이 북측 참관인도 북쪽 문을 열고 들어와 내부를 둘러본 뒤 다시 북쪽 문으로 나간다. 군사분계선이 해소된 곳이긴 하지만 이곳에서 남북한 참관인이 만날 수는 없다. 남측이 참관중일 때 북측 참관인은 들어올 수 없고, 북측이 참관중일 때 남측 참관인은 들어갈 수 없다.동시 참관이 안되는 것도 약속이다.

T2의 남북 양쪽 출입문은 각각 이중으로 돼있다. 바깥쪽 문은 외부에 자물쇠를 장치해놓고 있지만 안쪽 문은 모두 내부에 자물쇠 장치가 있다.

남측의 참관이 끝나면 입회했던 경비병은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면서 안쪽 문은 그대로 둔 채 밖에서 바깥쪽 문만 잠근다. 북측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남북 양쪽의 내부 문은 항상 열려있는 셈이다.

얇은 벽과 유리창으로 분리된 T2의 안팎은 분위기가 천양지차다. T2 외부의 군사분계선은 T2 건물 한중간으로 이어진 폭 50cm, 높이 5cm의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다.

이 경계선은 넘을 수 없다. 이 경계선의 남북쪽에는 양측의 경비병이 부동자세로 버티고 있다. T2 내부에서는 유리창을 통해 바깥에서 대치하고 있는 양측의 경비병 표정까지 볼 수 있다. 분단이 해소된 T2 내부에서 마치 국외자인 양 분단의 최전선을 목도할 수 있는 것이 판문점의 아이러니다.

자유로를 달려 통일대교에 들어설 즈음, 기러기떼가 임진강을 넘어 북녘 하늘을 향해 날고 있었다. 통일대교 입구에서 간단한 검문을 마친 뒤 마치 기러기떼를 추격하듯 판문점을 향해 차를 달렸다. 판문점은 행정구역상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문산과 개성을 연결하는 1번 국도 상의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 통일대교에서 4차선 1번 국도를 통해 판문점에 도달하려면 먼저 통과해야 할 곳이 있다. 민통선 입구에 있는 '유엔사령부 경비대대'(UNCSB)가 그것이다.


경비대대 500명중 300명이 한국군

UNCSB는 JSA를 경비ㆍ관리하는 유엔사령부 소속 부대다. UNCSB의 부대명칭은 '캠프 보니파스'. 1976년 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 희생된 미군 대위 보니파스를 추모하기 위해 1986년 붙인 이름이다. 그 이전까지 이름은 '캠프 키티호크'였다.

캠프 보니파스의 병력은 한미 합동군으로 편성된 500명. 300명은 한국군이고 나머지는 미군이다. 1990년 초까지는 미군이 더 많았으나 이후부터 한국군의 비중을 늘렸다. 캠프 보니파스에 근무하는 병사들은 한국군이든 미군이든 유엔사 소속으로 돼있다.

캠프 보니파스는 경비중대와 본부중대로 구성돼 있다. 전투력 위주로 편성된 경비중대의 중대원은 전원이 차출된 한국군이다. 행정지원 업무를 담당하는 본부중대는 미군과 카투사로 구성돼 있다.

본부중대에서 한국군과 미군의 업무는 차이가 없다. 캠프 보니파스의 대대장은 미군 중령, 부대대장은 한국군 소령이 맡고 있다. 본부중대 중대장은 미군 대위, 경비중대 중대장은 한국군 대위가 각각 맡고 있다.

캠프 보니파스에서 미군이 운전하는 판문점 출입 전용차량으로 갈아타고 제2초소를 지나면 비무장지대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는 1번 국도가 2차선으로 좁아진다.

현재 남북한을 연결하는 유일한 육상로인 1번 국도의 좌우에는 논밭과 지뢰밭이 혼재해 있다. 캠프 보니파스에서 약 2km, 마침내 '자유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판문점 구역에 들어온 것이다.

늦가을의 쌀쌀함 속에 판문점은 썰렁했다. 판문점에 들어올 수 있는 쌍방의 병력은 장교 5명과 사병 30명으로 제한돼 있다. 남북한간에 특별한 행사나 관광단이 없으면 구역은 한적하기 마련이다. 곳곳에 높이 세워져 있는 무인 감시카메라만 없다면 명절기간의 대학교정을 연상할 정도다.

판문점내 북측 지역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은 자유의 집. 자유의 집 3층에는 남북연락사무소와 직통전화가 있다. 자유의 집 4층 베란다에 올라서면 여유는 긴장으로, 다시 착잡함으로 바뀐다.


그림자만 넘을 뿐…긴장의 분계선

첫 눈에 띄는 것이 북측 판문각. 취재진을 발견한 인민군 1명이 판문각에서 나와 망원경으로 남측을 살피기 시작했다. 판문각 지붕에는 무인 감시카메라들이 남측을 향해 있었다.

판문각 앞에는 군사분계선 표지를 가로질러 직사각형의 단층 건물 7동이 남북 방향으로 세워져 있다. 이들 건물 중 3동은 중립국 감독위원회실(T1), 정전위 본회의장(T2), 공동일직장교 회의실(T3)이다. 현재 관광객과 참관단에게 유일하게 개방된 건물은 T2다.

T2 내부의 회담테이블은 3년간의 한국전쟁을 끝낸 자리다. 1953년 7월27일 이곳에서 북한ㆍ중국과 유엔군 간에 전문 5조36항으로 된 휴전협정이 조인됐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외국에 의해 중재됐던 또다른 비극의 자리다. 휴전협정 조인과 함께 판문점은 공동경비구역으로 정해졌다. T2는 과거 남북간의 자존심 싸움터였다.

테이블 위에 꽂는 유엔기와 인공기 깃대는 회담 때마다 경쟁적으로 높아져 나중에는 천장에 닿다 못해 건물내로 들여놓기도 어려웠다. 현재는 약속에 의해 깃대높이를 40cm로 통일했다.

돌연 T2 창밖이 부산해졌다. 인민군 10여명이 거위걸음으로 행군해오더니 T1, T2, T3 건물 주변에서 부동자세로 위치를 잡았다. T2를 빠져나오자 판문각 앞에서 기념촬영중인 북한측 관광객들이 보였다.

김일성 배지를 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외국인임이 분명했다. T2 주변 군사분계선의 양측 경비병은 항상 대치해있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이 있거나 행사가 있을 때만 배치된다. 남측 경비병은 남측 관광객이 참관할 때만 배치되고 참관이 끝나면 철수한다.

양측 경비병의 자세와 복장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 나오는 그대로다. 남측 경비병은 선글라스를 끼고 기마자세를 취하는 반면, 북측 경비병은 선글라스 없이 차려자세를 하고 있다.

우리측이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것은 상대방에 눈동자의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다. 영화에서처럼 경비병끼리 그림자가 넘어왔다고 문제삼는 일은 없고, 말을 주고 받지도 않는다. 남북측 경비병의 무장은 권총으로 제한된다.

경비병들에게는 교전규칙이 있다. 남측의 경우 강제피납될 경우에만 분계선을 넘어가 구출해올 수 있지만 자유의지로 넘어갔을 경우에는 월경해 데려올 수 없다.

판문점 구역은 남북 600m, 동서 800m의 타원형이다. 판문점 구역과 JSA는 동일하다. 영내의 주요 건물은 남측의 자유의 집과 평화의 집, 북측의 판문각과 통일각 등 4동이다. 이밖에 막사와 초소들이 있다.


'돌아오지않는 다리' 절반은 북한땅

판문점의 또다른 명물은 사천강을 가로지르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1953년 8월과 9월 포로교환이 이뤄졌던 곳이자 영화 JSA에서 밀회의 통로로 이용된 다리다.

판문점 구역은 사천강의 중간을 경계선으로 하고 있어 이 다리의 저쪽 절반은 JSA가 아니라 북한땅이다. 이 다리를 중심으로 한국측 4초소와 북한측 7초소가 마주보고 있다. 북한 7초소는 판문점 밖이라 인민군이 중무장하고 있는 반면, 한국 4초소 경비병은 권총무장 밖에 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측은 4초소에 무인카메라를 설치해 경비병을 대신하고 있다.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났던 곳은 바로 한국측 4초소 뒷편이다.

사천강 너머 북한땅으로 눈을 돌리면 멀리 구(舊)판문점이 보인다. 구판문점은 당초 개성에서 열렸던 휴전회담이 양측의 공방전으로 위협받으면서 1951년 10월25일 옮겨온 곳이다.

그후 다시 정밀측량에 의해 비무장지대 중간지점인 오늘날 판문점으로 이전했다.

판문점에서는 두 개의 거대한 국기게양대를 볼 수 있다. 남측 대성동의 100m 높이 게양대와 북측 기정동의 160m 짜리 게양대다. 남측에 지지않기 위해 더 높이 만든 기정동 인공기 게양대는 세계 최고 높이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 게양된 인공기는 가로 30m, 세로 14m.

T2 건물 내부를 자유지대로 만들었듯이 남북한은 또다시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없을까. T2 건물 밖에서도 남북한 주민이 자유로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들 수 있도록 약속할 수는 없을까. 판문점 도처에 설치된 감시카메라와 도청장치를 철거하는 약속은 할 수 없을까.

'약속의 날'이 기다려진다. 무장해제한 남북한의 JSA 경비병이 만나 실없이 높이 세운 국기게양대들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지을 수 있는 그 날이.

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0/11/14 20:32


배연해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