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미국대선] 미국 민주주의 명예에 먹칠한 선거

'바나나 공화국(혼란한 남미의 작은 나라) 같은 하루'(이탈리아의 라 레푸블리카지), '선거부정은 제3세계의 전유물이 아니다'(짐바브웨의 국영 헤럴드지), '워싱턴, 문제가 생겼다'(스위스의 뱅 갸트르 외르지), '푸틴이 앞서고 있다'(러시아의 웹사이트 아넥도트), '포레스트 첨프'(영국의 미러지) 등등.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만하룻동안 일어난 어지러운 판세를 세계 언론은 1면 제목에서부터 이렇게 비꼬았다.

백미는 '포레스트 첨프'. 톰 행크스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이 초콜릿 박스를 안고 앉아 있는 장면을 빗대 조지 부시와 앨 고어, 두 후보를 '포레스트 첨프(얼간이)'로 패러디했는데 당선 결과를 기다리는 부시와 고어의 표정이 멍청해보인다.

굳이 '부끄러운 미국 대선의 이전투구'라는 미러지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11ㆍ7 대선을 놓고 세계적으로 "전혀 미국답지 않은 선거"라는 소리가 높다. 지금까지 민주주의의 교과서로, 정의와 진실, 공정성을 앞세워 제3세계 국가에게 한수 가르쳐온 미국의 자존심에 생채기가 난 것이다.

CNN을 비롯한 메이저 언론의 너무 앞서간 보도 탓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개표 막바지까지도 팽팽한 접전을 벌여온 부시와 고어 양 진영이 서로 대권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으로 '진흙탕 싸움'에 뛰어든 게 가장 큰 원인이다.


결과 승복 않고 법정투쟁으로 갈 가능성도

게다가 논란이 되고 있는 플로리다주 개표결과에 따라 두 후보중 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더라도 상대가 이에 승복하지 않고 법정 투쟁으로 갈 가능성이 높아 자칫 차기 대통령의 정통성 자체가 크게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양 진영의 움직임을 보면 미국답지 않다. 1차 개표에서 패배한(민주당)측이 선거의 공정성을 문제삼으면서 부정선거 가능성을 흘렸고, 기다렸다는 듯이 지지자들이 피켓을 들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승리한(공화당)측도 이에 지지 않고 맞서는 바람에 국론분열 현상이 심화하는 등 정국은 갈수록 혼탁한 양상이다. 또 뉴멕시코주의 재검표 결과 1차 개표에서 졌던 부시 후보가 승리하는 등 개표작업에 대한 신뢰도마저 크게 떨어졌다.

12일 현재 부시 후보와 고어 후보가 확보한 선거인단은 각각 246명과 262명. 문제가 된 플로리다주에는 25명의 선거인단이 걸려있어 어느 후보든 플로리다주에서 승리하면 당선자로 확정된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부시 후보가 300여표 앞서고 있으나 당락을 좌우할 관건은 역시 2,000여명에 이르는 부재자 투표.

1996년 대선에서는 공화당이 부재자 투표중 약 56%의 지지를 얻었지만 이번에는 민주당이 1,000여명에 이르는 이스라엘 거주 미국인의 몰표를 기대하고 있어 섣부른 속단은 금물이다.

따라서 부재자 투표가 끝나는 17일에야 최종 승자가 결정될 전망이다.


고어, 부시 승리할 경우 정치쟁점화 시도 계획

승패가 갈라지더라도 혼란은 끝나지 않는다. 고어진영은 부시가 승리할 경우 플로리다의 팜비치 카운티 등 4개 지역에 대한 불공정 및 부정선거 의혹을 법정으로 옮겨가는 등 정치쟁점화를 시도할 계획이다. 그럴 경우 대통령 당선자가 상당기간 결정되지 못하는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다. 고어진영이 내세울 쟁점은 두 가지다.

일부 지역에서 나온 1만9,000여표의 무효표와 팻 뷰캐넌 개혁당 후보가 얻은 3,407표다. 고어측은 두 사안 모두 기표용지의 디자인 잘못으로 유권자들이 혼란을 일으켜 고어 후보의 표가 뷰캐넌에게 넘어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뷰캐넌은 팜비치 카운티에서 주내 다른 카운티의 추세와는 달리 3,407표라는 많은 표를 얻었으며, 이는 주내 67개 카운티 득표수의 20%에 해당한다.

그러나 부시측은 1996년에도 무효표가 1만4,000표 가량 나왔으며 디자인도 사전에 합의된 것이라며 일축하고 있다. 주법에 따르면 문제의 투표용지는 불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재선거를 명령했을 경우 나타날 사회적 파장을 고려할 때 법원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지 관심거리다.

플로리다에서는 1997년 마이애미 시장선거때 부재자 투표에 대한 선거부정을 이유로 법원이 재투표를 결정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양측이 곧 문제가 된 4,500표의 부재자 투표를 모두 무효화하는 선에서 절충점을 찾았었다.

미 대선에서 부정선거 논란이 인 것은 1960년 리처드 닉슨(공화당)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패했을 때. 하와이와 일리노이주에서 부정표가 나왔으나 닉슨이 이를 감수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어측이 감수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부시는 전국 득표율에서 0.2%(11만표) 가량 뒤졌지만 고어는 11만표 가량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욕심만 앞세운다" 비판

일각에서는 혼탁한 상황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초래된 것과 같은 정통성 위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당시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민주당과 국민은 심정적으로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국내외적으로 미국의 지도력이 문제가 됐었다.

플로리다주 부재자 투표의 개표 결과 부시가 승리하면 전국 득표율에서는 상대에게 뒤진 '소수파 대통령'이 된다.

미 대선에서 소수파 대통령은 두 차례 나왔는데 모두 그 다음 대선에서 패배했으며 반대로 패했던 앤드루 잭슨(1824년)과 그로버 클리블런드(1888년)은 4년 뒤에 대통령직에 올랐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국 언론은 부시든, 고어든 결과에 승복해 선거에 따른 혼란을 끝낼 것을 촉구하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번 선거에서 부시와 고어 후보는 선거전에서부터 지금까지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있다.

선거전 여론조사에서 서로 엎치락뒤치락했고, 선거가 끝난 뒤에도 시시각각으로 마음을 졸여야 했다. 가장 먼저 투표가 끝난 인디애나와 켄터키주 출구조사에서 부시측이 환호성을 올렸으나 곧바로 미시간과 펜실베이니아 등 대형 경합주를 고어측에 넘겨주면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운명의 플로리다주에서 승리 소식이 전해지면서 부시 진영에선 샴페인이 터졌다. 고어 후보의 축하 전화도 걸려왔다. 뉴욕포스트는 붉은 색의 큰 활자체로 '부시 승리'(BUSH WINS)로 보도하는 등 언론은 부시승리를 기정사실화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뉴욕포스트와 마이애미 해럴드는 1948년에 '듀이, 트루먼 누르고 승리'라고 오보를 낸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꼴이 됐고 상황은 점점 더 꼬여가고 있다.

미국의 한 언론인은 이번 사태를 '제2의 르윈스키 사건'이라고 불렀다. 양당은 말로만 정의와 진실을 외치면서 국가는 어떻게 되든 정치적으로 욕심만 달성된다는 된다는 식으로 치닫고 있는 현 상황을 비꼰 것이다. 미국은 지금 르윈스키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부끄러운 백악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0/11/14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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