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팔메토

폴커 슐렌도르프 감독은 성장을 멈춘 소년을 통해 독일 현대사를 고찰한 <양철북>,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일부를 영화로 옮긴 시대물 <스완의 사랑>, 연극으로 유명한 <세일즈맨의 죽음>, 부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사랑과 슬픔의 여로>, 출산까지 통제하는 미래사회를 고발한 <핸드메이드>로 알려진 감독.

독일 뉴저먼 시네마의 일원으로서 역사, 정치, 사회에 깃들인 부조리를 고발하는, 사회성이 강한 영화를 발표한 초창기 독일에서의 작품이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은 채 문학작품 각색에 관심을 보인 이후 작품이 주로 수입된 셈이다.

슐렌도르프의 1999년 작 <팔메토 Palmeto>(18세, 콜럼비아)는 플로리다를 배경으로 한, 끈적이는 느와르풍 에로틱 스릴러물이다. "슐렌도르프, 당신마저도."라는 탄식이 새어나올 정도로 의외인데 장르 영화의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해 아쉽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러내리는 습하고 더운 기후,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서 맞딱뜨리게 된 미모의 여인과 그녀의 야릇한 유혹, 그 여인에게 빠져들어 범죄에 휘말리는 불운한 사나이, 의외의 반전과 비도덕적 결말. 느와르풍 에로 스릴러물은 웬만한 영화 관객이라면 시나리오를 쓸 수 있을 정도.

<팔메토>는 배우 캐스팅이 눈길을 끈다. 관리의 부패를 파헤치다 2년 옥살이 끝에 무혐의로 출소하게 된 뉴스 리포터 해리 바버 역을 삐딱한 성격 배우 우디 해럴드슨이 맡고 있다.

그를 어제 헤어진 연인인 양 반갑게 키스로 맞이하는 조각가 애인 니나 역에는 <바운드> <쇼걸>로 이름을 얻은 지나 거손.

신문 구인난을 뒤적이며 바에 앉아있는 해리에게 무심을 가장한 유혹의 눈길을 보내고 고의적으로 핸드백을 놓고 나가는 금발 미인 레아 역을 건강한 양키걸 이미지를 떨치지 못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슈가 맡아, 미스캐스팅의 전범을 보여준다.

레아는 해안에 호화 요트를 정박해놓고 있는 프랑스 노인 펠리스 말로(롤프 호프)의 젊은 부인.

레아의 제안대로 해변 저택으로 심부름을 간 해리에게 무례하게 구는 젊은 미남 관리인 도넬리(마이클 레파포트)와 핫 팬티 차림으로 유혹하는 말로의 조숙한 딸 오데뜨(숄 세비그니).

이상의 인물 분포도만으로도 이후의 사건 전개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도 힌트가 부족하다면 로렌스 캐스단의 <보디 히트>와 밥 라펠슨의 <블러드 앤 와인>을 참고하시길.

감독 나이 60살에 발표한 <팔메토>는 1930년대의 영국 작가 르네 레이몬드의 'Just Another Sucker'가 원작.

미국 범죄소설을 좋아해 '제임스 하들리 체이스'라는 필명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했던 통속소설 작가 레이몬드는 왕성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도발적인 인물, 혹은 상실감에 빠진 나약한 캐릭터들이 삼각 관계에 얽혀 범죄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야기들을 썼다.

이런 소설에 매력을 느낀 슐렌도르프는 미국을 한번도 가보지 않았으면서 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쓴 원작자를 대신하여 미국 시나리오 작가와 배우에게 영화를 맡겼다.

1940년대 느와르 영화 전통에 1990년대 미국의 정체성을 담으려 했다는 감독의 의도는 채워지지 못했지만, 야자수 모양의 나무 사발 팔메토와 플로리다에 실재하는 도시 팔메토를 제목으로 택해 미국 분위기를 살리려 애를 썼다.

옥선희 비디오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0/11/21 22:57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