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그릇 역사기행(33)] 경주(下)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조화

"생사 길은 이에 있으메 머뭇거리고/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가나잇고/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진 잎처럼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아아 미타찰에서 만날나 도 닦아 기다리겠스라."

누이동생을 여읜 지극한 슬픔을 불교의 깊은 정신세계와 짙은 서정적 시심(詩心)으로 승화시킨 신라 향가의 백미인 월명사의 '제망매가'다.

이처럼 신라인은 대우주의 절대자유의 경지에 노닐면서 생(生)과 사(死)를 둘이 아닌 하나로 생각하였다. 맑은 영혼으로 토기를 구웠기 때문에 항상 신과의 대화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토기장인을 비롯한 모든 신라인은 대우주와의 조화를 깨닫고 그물 속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은 자유로움과 물같은 유연함을 가졌다.

남산은 신라시대 서라벌의 주산인 동시에 신라인이 영혼의 안식처다. 신라인의 종교관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불교신앙을 가졌지만 공허한 교리에 빠지지 않고 경주와 신라 땅 전체에 불국정토의 세게를 구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남산 계곡 구석구석에 많은 장엄한 불교적 상징물을 조성하고 현세에서의 안녕을 빌었다.

음력 시월보름날 저녁 남산으로 가는 길은 지금도 월명사의 피리소리를 듣고 달도 멈춰버릴 것만 같다.

경주의 남쪽에 자리한 내남면 망성리 신라토기 가마는 5세기경부터 8세기에 이르기까지 신라 최대 규모의 가마터다. 이 가마터가 우리나라 학계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64년 봄 기행자의 선친에 의해서였다.

발견 당시에는 터널식의 가마가 반쯤 무너진 상태였다. 이곳에서 제작된 토기의 종류들은 꽃무늬가 음각된 고배, 목이 긴 항아리, 토우, 발이 긴 항아리 등 다양한 종류다. 재유가 시유된 도편도 일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재유토기 도편은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어가는 과정에서 기술적인 향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도편이다.

이곳 가마터에서 최고 1200℃의 고화도의 재유토기들을 구웠던 것으로 판단된다. 망성리 토기 가마터는 1967년 몇차례 발굴조사가 되었고 지금은 농경지로 변하여 옛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망성리 토기 가마터와 함께 또다른 대규모 가마터가 있는 곳은 경주시에서 서북쪽으로 약 10㎞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천북면 화산리와 동산리다. 이곳 가마터도 규모면이나 토기를 제작한 종류, 연대 모두가 망성리 가마터와 동일하다.

현재까지 경주 부근에서 확인된 가마터는 20여 군데 이상이며 한가지 특징은 신라시대 토기 가마터가 있는 곳에 고려청자 가마터와 조선 분청사기 가마터가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토기와 자기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가마터 답사기행을 마친 해질녘 만추의 신라 고도는 유달이 적막해 보였다. 뒤죽박죽의 도시개발로 건축된 회색 콘크리트 아파트 숲을 보자니 "과연 우리는 신라 천년의 전설과 역사와 예술의 숨쉬는 경주를 가질 자격이 있는가"라고 자문해보면서 후손으로서 역사의 심한 죄책감을 느꼈다.

서울에 살면서 경주를 유달리 사랑하는 김대규형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하루속히 고도보본법이 제정되어 경주시민도 재산권의 침해가 없고 역사의 푸른 이끼가 서려있는 고도 경주가 자소만대까지 잘 보존될 수 있는 상생(相生)의 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막걸리 일배에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현암 최정간 도예가

입력시간 2000/11/2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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