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35)] 적군파(赤軍派)②

1970년 3월의 요도호 납치사건으로 적군파는 그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도쿄(東京) 하네다(羽田)발 후쿠오카(福岡)행 일본항공(JAL) 여객기인 요도호를 공중납치한 9명의 적군파 대원은 김포공항을 거쳐 평양으로 날아갔다.

해외 거점을 확보, 군사훈련을 거친 후 일본은 물론 세계 동시혁명을 겨냥한다는 시오미의 '국제 근거지론'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해외거점의 최우선 후보지로 꼽혔던 북한은 이들에 대해 특별한 환영을 베풀지 않았다.

그 결과 중동이 새로운 후보지로 떠올랐고 1971년 2월 시게노부 등 19명이 레바논으로 날아갔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가장 급진적 단체인 팔레스타인해방 인민전선(PFLP)과 연대, 베카고원을 거점으로 '적군파 아랍지부'를 발족하고 군사훈련과 이스라엘과의 투쟁에 나섰다.

아사마(淺間)산장 사건으로 일본 국내의 적군파가 맥이 끊기자 이들은 적군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아랍 세키군(赤軍)'을 자칭했으나 '니혼 세키군'(日本赤軍)이란 이름이 훨씬 널리 쓰였다.

일본 국내의 적군파는 주요 지도자들이 잇달아 검거되고 수사망이 좁혀 드는 가운데 1971년 7월 공산당계 지하조직인 인민혁명군과 결합, '렌고 세키군'(連合赤軍)을 결성했다.

이들은 경찰에 쫓겨 군마(群馬)현과 나가노(長野)현의 산악 지대를 떠돌았으며 아사마 산장 사건을 끝으로 완전히 맥이 끊겼다.

1972년 2월19일 마지막 렌고 세키군 5명은 아사마 산장에서 인질을 잡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28일 경찰 특공대가 돌입, 5명을 체포하기까지 경찰 1명이 숨지고 25명이 부상했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초겨울에 내려진 소집령에 따라 산악지대에 모인 29명중 14명이 내부 처형된 것으로 드러났다. 자아비판 과정에서 연애 경력 등을 이유로 동료를 간단히 죽음으로 내몰고 임신부까지 처형한 극한적 잔혹상에 일본 국민은 치를 떨어야 했다.

중동의 니혼 세키군은 1972년 5월 3명이 자동소총을 난사, 여행객 24명을 살해하고 76명을 부상시킨 텔아비브 공항 사건을 계기로 한동안 아랍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이후에도 3명이 주네덜란드 프랑스대사관을 무장 점거, 대사 등 11명을 인질로 잡고 프랑스에 수감된 동료를 석방시킨 1974년의 헤이그 사건 등 크고 작은 11건의 국제테러를 자행했다.

주로 항공기를 납치하거나 대사관을 점거해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목표를 공격하는 이들의 행동 방식은 국제테러의 원형으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냉전 종결과 걸프전쟁, 중동평화 회담 등 국제적 상황 변화는 중동에서의 이들의 지위를 흔들었다. 무엇보다 걸프전쟁에서 다국적군에 참가한 시리아가 미국의 묵시적 동의 하에 레바논을 실효 지배하면서 이들의 행동 반경은 크게 좁혀졌다.

1997년 레바논은 국제적 압력과 타협, 베이루트에 잠복한 5명을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니혼 세키군 버리기'에 나섰다. 이중 4명은 올 3월 일본으로 송환돼 재판을 받고있다.

국제 수배에 쫓기면서 중남미나 동남아로 흩어져 새로운 거점을 찾던 대원도 잇달아 검거되고 있다. 시게노부가 붙잡힘으로써 레바논 여성과 결혼한 오카모토 고조(岡本公三)를 뺀 니혼 세키군은 6명만이 남았고 완전 소멸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시게노부는 1998년 이래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인민혁명당의 창설을 모색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의 현실상 허황되기 짝이 없는 구상으로 개인적 위안의 수단이라는 인상이 짙다.

북한으로 간 요도호 납치범의 운명도 거의 비슷하다. 9명중 3명이 북한에서 이미 눈을 감았고 1명은 일본에 잠입했다가 1988년에 붙잡혀 이미 형기를 마쳤다. 동남아를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다나카 요시미(田中義三)가 6월 말 태국에서 송환됨으로써 북한에는 4명만이 남아 있다.

일본 정부가 대북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테러 지원국 해제를 위한 북미협의에서도 이들의 추방이 핵심 조건이 돼 있어 오래지 않아 국외 추방돼 일본으로 송환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 속으로 묻혀가는 적군파의 뒷 모습과 함께 한때 일본을 흔들었던 모든 변혁의 목소리가 아득해지고 있다. 대신 사회적 무관심과 다수의 침묵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그것이 집단주의로 온상이란 점에서 우익 강경파의 움직임을 주시하게 된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11/2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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