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사암침법'의 한의사 김홍경

잘 나가다 지난 주에는 폭격을 맞고 말았다. EBS 최고의 시청률이라는 여세를 몰아 진작에 하고 싶었던 훈민정음 부활운동을 일으킬 겸 '각해보겠어요...'운운의 내용을 넣었다가 바로 시청률이 곤두박질쳐 버렸다.

그 일이 있고 먹은 밥까지 체했다. 인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왕 하는 거, 멋지게 해 보고 싶다. 뜨뜻미지근한 강의는 나 스스로 자존심 상해 하기 싫으니까.

나, 김홍경. 뜨긴 확실히 뜬 것 같다. 애초 40회 예정이던 강의를 최근 방송국측에선 50회까지 늘리자고 한다. 내 강의는 어렵지도 않고 재미있다고들 한다. 사실 이건 완전히 원맨쇼다.

한방 강의에 갑자기 팝송도 틀어대고, 농담도 던지고, 퀴즈도 내고... 봐서 알겠지만 나는 얌전한 한의사가 아니다.

도무지 한 자리에 조용히 서 있지도 못하는, 이상한 놈이다. 이것도 약과다. 원래 내 주업인 학생들 강의땐 훨씬 더 요란하고 가혹하다. 방송에선 못하는 욕도 하고, 내용도 훨씬 전문적이다. 어렵기 때문에 더 재미있게 해야 아무도 졸지 않아서다.

내 이론도 한의학계 정설은 아니다. 절반 이상 내가 직접 연구하고 밝혀낸 것들이다.

'산수신산' 얘기나 12경락과 12간지, 바이오리듬과 경락을 각각 연결한 것도 기존학자들마저 처음 듣는 얘기일거다. 원래 나는 조선시대 3대 의성(醫聖)중 한 사람이었던 사암도인의 침법을 배운 한의학자다.

그 임상은 있지만 이론이 없었던 것을 내 나름대로 원리를 추적해 들어가면서 체계적인 이론으로 다시 복원한 게 사암침법이고, 요즘 내가 하는 강의는 그 모든 한의학적 지식들을 총동원한 정수로 보면 된다.


서럽게 공부한 한의학, 제적위기 넘기며 졸업

인기를 떠나서, 이제야 내 인생에 조금 면목이 서는 것도 같다. 불교경전에 '어설픈 자비는 짚벙거지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어정쩡하게 착할 바엔 차라리 매정한 게 낫다는 소리다. 나는 정말 독하게 살아왔다.

경성사범을 졸업한 어머니, 일본에서 대학을 마친 아버지, 오사카에서 한의사로 일하신 할아버지, 서울의대 산부인과를 나와 개업한 작은 아버지 등 우리 집안엔 의사가 많았다.

나 역시 서울의대에 도전했다가 두 번 낙방한 뒤 결국 경희대 한의학과를 택했다. 한의학을 미신처럼 천대하던 시절에 부모님 반대도 무릅쓰고 1967년 과수석의 성적으로 대학생 뱃지를 달았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같지 않았다. 웃기는 일이지만, 그땐 의예, 치의예, 약학과 등 모두 7개 단과대학이 뒤섞여 공부를 했을 때라 상대적으로 비교를 당하는 한의학과생들은 열등감에 시달렸다.

일종의 강요받은 열등감이었다. 의예과에선 기자재를 1억원씩 들여올 때 우린 고작 100만원도 지원되지 않았다. 토끼 등 동물 시체해부 실험때도 1개를 가지고 우리만은 학과생 전원이 함께 써야 하는, 참 서러운 신세었다.

방황했다. 공부하기가 싫었다. 세 번 제적을 당할 뻔도 했다. 출석일수 3분의 1 미달, 성적 미달, 한번은 대폿집 색시와 천마산에 놀러가느라 등록금을 탕진해 등록금 미납으로 잘릴 뻔 했다.

'그래도 면허는 따야 한다'며 친구들이 금반지를 모아 돈을 대신 내줬다. 산만하고 문란하게 살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 마시며 놀고, 등산, 바둑 등 눈에 띄는 동아리마다 기웃거리거나, 레코드 수집에 열을 올린 적도 있다. 한의대 최초로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경험도 있다. 문란해 봤자 행복하지 않으니 더 방황하기만 한 거다.

어렵게 학교를 졸업한 후, 1973년 대전에서 개업해 일하다가 75년 1월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 무렵 양가 부모의 허락 아래 이미 혼인신고까지 마친 여인을 버리고 출가해버린 것이다.

잠시 미국에 가 있으면 곧 뒤따라가겠노라고 속인 뒤 그녀가 떠나자마자 나는 송광사에 들어가 행자가 됐다. 종일 밥 짓고, 빨래하고, 깻잎, 김치 담그고, 장작 패고,... 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6개월쯤 지나자 슬슬 회의가 들었다.

꼭 이렇게 해야 되나. 공부에 대한 미련도 한몫 거들었다. 도망치듯 부산의 한 토굴에 틀어박혀 3박4일동안 고민한 뒤 내린 결론은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렇게 나는 바랑을 버렸다.

그후 11년간 떠돌이로 살았다. 친구집 신세를 지기도 했고, 그 무렵 사귀던 여성과 동거도 했다. 그리고 재야의 스승, 스님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돈도, 의지할 곳도 없는, 철저하게 절망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반드시 학자로서 뭔가 떳떳한 것을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는 오기가 강박증처럼 따라다녔다. 이따금 한의원을 개업했다가도 때려치우기를 반복, 종로5가 한의원 밀집가에선 소위 관리의사로 남의 집 살이를 20군데 이상 전전하고 다녔다.

요즘은 달라졌지만 옛날만해도 부정행위가 많았다. 이익을 남기려고 약재를 속이거나 처방을 어기는 등, 그런 작태만 봤다 하면 바로 경찰에 고발해버리거나 그 자리를 엎어놓는 등 얌전히 눈감아 주질 않으니, 아침에 들어가서 저녁에 쫓겨나기 일쑤였다.

악질로 소문이 나, 나중엔 그곳 한의사들끼리 "김홍경이를 받아주면 제명해버리겠다"고까지 했다. 그 떠돌이 생활 막바지에 부산의 동국대 시간강사 일을 맡게 됐다. 첫 강의가 있던 날, 나는 그곳이 내가 서야 할 자리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 덜렁덜렁하는 끼가 많은 나는 딱 강의체질이었다.

한의학에 대한 사명감도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여름방학이면 40일간 대학생 강의, 겨울방학이면 무료진료봉사활동을 떠나는 게 내 본업이자 낙이었다.


수덕사 혜암스님에게 사암침법 전수

사암침법에 관심을 가진 건 74년 척추 디스크 환자를 고치면서부터였다. 원리는 모르지만 하라는 대로 침을 놓으니 신통하게 나았다. 너무도 신기해서 꼭 연구해보기로 했다. 83년 수덕사 혜암스님을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사암침법의 전수를 받았다.

고생도 무지했다. 첫 1년간은 스님에게 제자 취급조차 못 받았다. 날이면 날마다 이상한 선문답만 던지며 나같이 되바라진 놈의 기를 팍팍 꺾어놓으셨다.

"무엇이 부처냐?" 내 딴엔 깊은 생각 끝에 "마른 똥막대기입니다"라고 대답하면 "틀렸다. 꺼져라"며 쫓아내시면 끝이었다. 아는 척 하면 할수록 더 무시당했다. 주위에선 3개월을 못 버틸 거라고 했지만, 내가 독한 놈은 독한 놈이다.

1년이 지나도 물러갈 생각을 않자 결국 큰스님이 가르침을 열어주셨다. 그외에도 짧게는 하룻밤 스승부터 길게는 3년 스승까지, 이름난 스님마다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며 배웠다. 유심론에 기초한 사암침법의 의술에다 주역 등등, 그 모든 임상 한방지식들을 그렇게 깨쳤다.

독한 얘기를 더 하자면, 특히 대학교수들에게 대단한 악질로 소문났던 게 나다. "대학교육이 한의학을 망치고 있다"고 그들을 정면에서 공격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육을 탓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한의학이 왜 서양의학을 닮으려고 안달인가. 한의학도 일종의 수양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학문인데 왜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못 찾고 서양식을 쫓아가나. 그 모양이 너무 답답하고 한심해보였다.


학생들 사이에서 '한방불패 교주'로

그래도 힘이 된 건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었다. 누가 억지로 가란 것도 아닌데 강의때엔 언제나 학생들 수백명씩 몰려들었다. 그것은 그들 역시 젊은 날 내가 느꼈던 갈증처럼 당시 대학에서 주지 못한 뭔가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개중엔 내 강의를 녹취해 수백부씩 프린트물로 복사해 돌려보는 학생들도 있었고, '한방불패 교주'라며 마치 사이비 교주처럼 나를 떠받드는 학생 등등, 반응이 대단했다.

전두환 정부 당시 광화문에서 신농백초한의원을 개업했을 땐 강의때마다 하도 학생들이 모여드니까 혹시 시위음모를 꾸미는 게 아닌가, 전경들까지 감시차 들락거렸다.

88년 서울 잠실의 한 백화점에서의 개업을 끝으로 돈 버는 진료활동은 그만두었다.

개업했다가도 강의와 병행하기가 힘들면 차라리 한의원을 포기하곤 했는데, 그 무렵 아는 후배의 소개로 다시 문을 열었다가 "김홍경 선생도 돈독이 올랐냐"는 누군가의 소리를 듣고 너무 화가 나 그날로 때려치워 버렸다. 그런 너절한 소리까지 들어가며 돈 벌고 싶진 않다.

내 이름이 조금씩 알려졌다. 방송에도 이따금 출연하고, 언론에도 사암침법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때도 내 입심은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모 방송사의 MC제의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다 5년전 또한번 인생의 폭격을 맞았다. 내가 믿고 사랑했던 여인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녀의 장래를 위해 미국 유학까지 보냈는데, 예정된 4년이 지나 돌아와야 할 시점에서 느닷없이 나와 헤어지겠다고 통보해왔다. 큰 충격이었다. 남 보기도 수치스러워 거의 모든 일을 접고, 숨어 지내듯 살았다. 꼬박 4년간의 은둔생활이었다. 한편으론 과거에 내가 한 여자를 버렸던 그 업보를 받는구나 했다.

나같이 독한 한의사도 사랑엔 별 수 없더냐고? 나,참. 나도 사람이다. 사랑한 여자가 고무신 거꾸로 신는데 괜찮은 남자가 어디 있겠나. 여자의 배신은 남자 양기를 다 죽여버리는 거다.


배신 충격 딛고 다시 세상 속으로

단지 학생들과의 봉사활동만은 그 기간에도 계속했다. 다시 방송과 인연이 맺어진 것도 그 현장취재가 계기였다. 조금씩 활동을 재개하고, 방송에도 나가고, 결국 지금 하고 있는 EBS 강의도 맡게 됐다. 정말 인기이긴 인기인지, 최근엔 모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도 들어왔다.

하지만 거절했다. 그만한 명예도 없겠지만, 내겐 이미 늦었다. 그걸 하자고 이렇게까지 힘들게 살았던 게 아니다. 돈벌이도 마다하고 지금껏 그 난리를 피우며 살았을 땐 다 그만한 무엇이 있어서다.

그 심정을 알아줬으면 한다. 나를 부를 양이면 차라리 진작 외로울 때 불러주지, 왜 이제야 부르나. 언더그라운드로서 나는 바깥이 내 생리에 더 맞다.

젊었을 땐 아프기도 많이 아팠다. 출가전엔 폐결핵 4기까지 갔었고, 황달에다 비흉증으로 수술을 받은 적도 있다. 그대로 두면 죽겠다 싶을 즈음 독하게 마음먹고 술을 끊고 나니 몸이 좋아졌다. 요즘은 잘 아프지도 않지만, 어쩌다 아파도 내 병 내가 다 고친다.

평소 내 건강수칙은 이런 거다. 죽도록 배가 고플때까지 기다렸다가 먹는 것, 죽도록 자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 자는 것. 말하자면 억지로 살지 않는다는 거다.

결혼? 내 나이가 벌써 오십이다. 세탁기에다 식기세척기까지 있는데 이 나이에 새삼 무슨 결혼이겠냐. 별 생각없다. 지난주엔 기자가 다섯명이나 다녀갔는데, 기사가 실린 걸 보니 나를 딴따라니, 동키호테니, 배반의 인생이니,...별명도 가지가지더라. 뭐라 부르든 난 상관 안한다.

누구나 자기가 보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요즘은 개업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다시 그것도 고민이다. 방송의 인기나 명예도 좋지만, 이걸로 큰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으면 아무래도 저 하고 싶은대로 살기가 어려운게 현실이다. 그게 재야의 고민이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0/12/05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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