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37)] 하바쓰(派閥)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사회에나 출신 가문이나 지역, 학교 등을 축으로 특수한 이익을 겨냥해 형성된 파벌이 있다. 파당을 짓는 일이 한국인의 특색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인식을 빚는 데 큰 역할을 한 일본에도 '하바쓰(派閥)'는 예외가 아니다.

메이지(明治) 유신의 주역인 사쓰마(薩摩·가고시마현)·조슈(長州·야마구치현) 출신들로 이뤄진 사쓰마바쓰(閥)·조슈바쓰는 이후 오랫동안 일본을 농단했다.

다른 지역 출신들을 배제하는 한편 서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러일전쟁 이후의 대륙침략 및 한일 강제합병 등은 모두 조슈 군벌이 획책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차 대전 이후에도 파벌은 일본 재계는 물론 학계, 언론계, 종교계, 문화·예술계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지금도 직장인들은 도쿄(東京)대학 출신을 가리키는 '도다이바쓰(東大閥)', 와세다(早稻田)·게이오(慶應) 대학 출신인 와세다바쓰·게이다이바쓰의 횡포를 술자리의 안주감으로 삼는다.

특히 정계에서 파벌이 미친 영향력은 엄청나다. 한국 야당사에도 오랫동안 계보 정치가 존재했지만 일본 자민당의 파벌 정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파벌 정치의 뿌리가 워낙 깊어 지금은 파벌하면 으레 자민당의 파벌을 가리키게 됐다. 1955년 구 자유당과 구 민주당이 합당해 거대 정당으로 출범할 당시부터 자민당은 파벌이 지배해 왔다.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기시 노부스케(岸信介)·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전총리 등이 각각 이끈 6개 파벌이 합종연횡을 거듭했다.

자민당이 중의원 선거에서 언제나 단독 과반수를 확보, 정권을 잡고 사회당(현 사민당)이 만년 제1야당이던 '55년 체제'가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 내각의 수립으로 종언을 고하면서 한때 자민당 파벌은 사라진 듯했다.

정치개혁에 대한 여론이 비등했고 그 화살이 파벌 정치의 근간인 정치자금의 투명화를 겨누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일본 언론은 '구(舊)다케시타파'·'구미야자와파' 등의 표현을 썼다. 파벌의 결속력이 과거와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98년 7월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총리 내각의 출범 이후 이런 현상은 사라지고 파벌은 완전히 부활했다.

자민당 파벌의 실상은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가 2001년 1월6일의 중앙부처 재편을 앞두고 행한 12월 5일의 개각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앞서 가토 고이치(加藤宏一) 전간사장이 야당의 내각 불신임안 제출을 틈타 퇴진을 요구하고 나선 당내 반란에 크게 놀란 모리 총리는 가토·야마사키(山崎)파를 제외한 모든 파벌 회장을 내각에 끌어 들였다.

최대 파벌의 회장인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전총리를 행정개혁·오키나와(沖繩)담당 특명장관으로 '모셨다'. 구 고모토(河本)파 회장인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 전외무장관은 법무장관이 됐고 고노파 영수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외무장관은 유임됐다.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전총리가 재무장관에 유임된 것도 '가토 반란'에 동조하지 않은 가토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탄생 준비에 들어 간 새로운 파벌의 실질적 영수이기 때문이다.

에토(江藤)럭·가메이파영수인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 전운수성장관이 정조회장에 유임된 것을 포함하면 모든 파벌 영수를 당정 요직에 배치한 셈이다.

파벌의 결속력은 부분적인 이합집산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유지돼 온 전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자민당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파는 요시다에서 출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오부치 전총리를 거쳐 하시모토 전총리가 이었다.

이 파벌은 합리적 보수주의를 견지하고 주변국과의 관계에는 유연한 자세를 자랑해 왔다. 요시다파에서 갈라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스즈키 젠코(玲木善幸)·미야자와파를 거친 가토파는 보수 본류를 자임하면서도 역사·방위 문제에서는 개혁적이다.

한편 기시파에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미쓰즈카 히로시(三塚博)파를 거친 모리파는 역사·방위 문제에는 강경하다.

흔히 일본 파벌 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총리와 각료 선임은 물론 중요 정책 결정까지도 파벌간의 이해 조정에 따름으로써 국민의 뜻과 멀어진다는 점이 지적된다. 총선에서 자민당에 참패를 안기지 못하는 일본 국민이 질 수 밖에 없는 운명적인 짐이기도 하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입력시간 2000/12/12 14:37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