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 퇴진론' 여권 권력 투쟁으로 비화, 당정쇄신으로 진화?

민주당을 휩쓸고 있는 '권노갑 퇴진론'의 태풍은 여권 권력투쟁의 이면과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정치판의 냉혹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12월2일 청와대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동영 최고위원이 '제 2의 김현철'에까지 비유하며 권 최고위원의 퇴진을 언급한 것이 이틀도 못가 흘러나온 것부터가 그렇다.

회의가 끝난 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최고위원들은 김 대통령 앞에서 한 얘기를 밖에 나가서 절대로 발설하지 않기로 결의까지 했었다고 한다.


청와대 발언 누가 흘렸나?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 얘기를 흘려 뇌관에 불을 붙였을까. 권 최고위원을 비롯한 동교동계의 2선 퇴진을 바라는 이른바 '반권파'(反權派)쪽에서 나왔을 것이란 점은 쉽게 상상이 간다.

아마도 정 최고위원 본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가 한 얘기를 자기가 흘린 것이 알려지면 그순간 정 최고위원은 정치적으로 매장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주의깊게 살펴볼 것이 있다. 정 최고위원이 청와대 회의에서 폭탄 발언을 할 것이란 점은 사전에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권 최고위원 본인도 정 최고위원이 그런 방향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정 최고위원을 사전에 설득하려 한 흔적도 발견된다. 최근 정부직에서 물러난 여권의 한 핵심 인사도 이러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 권 최고위원측에 대비책 강구를 권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상황에서 동교동계 2선 퇴진을 밀어 붙이기 위해 1일 별도의 모임을 가졌던 초선의원 중 몇몇이 정 최고위원의 발언 내용을 알고 있었던 사실이 포착된다.

또 정 최고위원 자신이 일단의 재선의원 그룹에게 청와대 회의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준 흔적도 있다.

일부에서는 최고위원 중에서 입이 가벼운 인사가 무심코 발설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으나 그보다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초ㆍ재선 의원 그룹에서 말이 새 나왔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봐야 한다.

또 그 말을 흘린 의도는 자명하다. 권 최고위원 진영에 타격을 가하기 위한 목적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당정쇄신론이 거센 바람을 타고 있는 상황에서 권노갑 퇴진론의 분위기만 감지되는 것과 대통령 앞에서 직접 거론됐음이 확인된 것과는 파괴력의 차이가 엄청나다.

동교동계 2선 퇴진을 건의하기 위해 별도 모임을 가졌던 초선의원 중에는 어차피 권노갑 퇴진론이 여권을 뒤흔들 핫이슈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정 최고위원이 초선의원의 동향을 사전 파악, 청와대 회의에서 기습 선제 공격을 가했다며 권노갑 퇴진론의 '지적 재산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권 최고 진영 '걸고 넘어지기'로 반격

이같은 정황이 역설적으로 권 최고위원 진영이 반격의 계기를 찾는 단초가 됐다. 정 최고위원의 발언이 공개되자 권 최고위원측의 첫 반응은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동교동계 내에서 갈등을 빚고 있는 한화갑 최고위원 진영에 의한 음모론을 제기한 것이다. 음모론을 제기, 동교동계의 내분 또는 여권 권력투쟁으로 몰고 가면 '권노갑 책임론'의 예봉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에 권 최고위원 진영으로선 어쩔 수 없이 빼들 수 밖에 없는 카드였다.

이러한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 이른바 반권 진영은 다소 혼란에 빠지는 모습이었고 급기야 당내 논란은 권노갑ㆍ한화갑 최고위원의 동반퇴진론까지 제기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다.

동반퇴진론은 그러나 여권 새판짜기의 판을 크게 흔들어서 자리이동이 대폭이 될 경우, 이득을 보는 세력이 제기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즉, 친권ㆍ반권이 아닌 제3의 세력이 동반퇴진론을 제기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동반퇴진론은 권ㆍ한 최고위원측이 모두 반발한 데다 전당대회에서 선출ㆍ인준된 최고위원직을 사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논리가 우세해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친권ㆍ반권 양 진영의 대결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는 상황에서 권 최고위원 진영이 조기수습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진노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 대통령의 의중에 정통한 한 최측근 인사는 "김 대통령이 짜증을 냈다"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최근 문화관광부 장관직을 사퇴했으나 여전히 김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는데 남다른 능력을 보이고 있는 박지원 전 장관이 노력한 흔적도 있다. 박 전 장관은 양쪽을 오가며 동교동계의 단합이 대통령의 뜻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권 최고위원측에서 음모론을 제기한 데 대해 한때 격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던 한 최고위원도 할 수 없이 화를 풀 수 밖에 없었다.

권ㆍ한 최고위원이 결국 김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던 10일 밤, 동교동계 소장파 의원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단합회동을 갖게 된 데에도 김 대통령의 진노는 크게 작용했다.


동교동계와 함께 국정원장 퇴진도 거론

권 최고위원 퇴진론의 파장은 결국 전진배치됐던 일부 동교동계의 2선 퇴진 쪽으로 이어졌다. 구체적으로는 민주당 김옥두 사무총장과 정동채 기조위원장의 교체가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가 됐고 청와대에 포진해 있는 동교동계인 남궁진 정무수석의 교체도 확실시되는 쪽이다.

다만 범동교동계인 한광옥 비서실장의 경우는 양론이 나온다.

반권파의 입장에서 보면 이같은 상황 전개는 만족할 수준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권파 진영의 얘기를 들어보더라도 권 최고위원의 최고위원직 사퇴까지 기대한 것 같지는 않다.

한때 반권 진영에서는 권 최고위원에 대한 '외유 요청설'을 흘리면서 권 최고위원 측을 압박하기도 했으나 이것이 꼭 권 최고위원의 사퇴를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라는 애기다.

권 최고위원을 비롯한 동교동 2선 퇴진론의 와중에 임동원 국정원장의 교체설이 불거지는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임 국정원장의 경우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친권ㆍ반권 양 진영에서 모두 교체설이 나오고 있다.

또 국정원은 보다 고유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는 인사에게 맡기고 임 국정원장은 남북 관계에 정통한 만큼 그 일을 특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적극론도 있다. 다만 국정원장 교체와 관련해서도 판을 크게 흔들려는 의도가 개입됐다고 보는 관측도 있다.

결국 권 최고위원 퇴진론이 발생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여권 내의 여러 세력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득실에 따라 치열하게 물밑 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 중에서 일부가 수면 위로 노출된 것이라고 보면 별로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사진>청와대 최고위원회 이후 민주당 당사에서 만난 권노갑(오른쪽), 정동영 최고위원이 어색한 표정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최종욱/사진부기자>

<사진>권노갑 퇴진론의 배후로 지목됐던 한화갑 최고위원(위)과 동교동계 2선 퇴진과 함께 교체설이 불거진 임동원 국정원장.

고태성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0/12/12 18:44


고태성 정치부 tsg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