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재야화단의 자유인, 주재환 화백

보라색 짜장면발이 산발처럼 휘날린다. 전화번호부 아래 소액대출 신문광고가 굴비처럼 엮였다. 빈 계란골판지가 귀거리, 전선을 붙인 채 사람처럼 서있다. 발 밑을 조심하시압. 거기도 100여 페이지나 다닥다닥 붙인 운전자용 지도 위로 퇴마신군이 노숙중이다.

이것은 미술관에 등장한 '유쾌한씨'의 흔적들이다. 한때 삐삐밴드가 신나게 불러제꼈던 '유쾌한씨의 껌 씹는 소리'가 이번엔 미술가 주재환(60)씨의 분신을 타고 미술관에 뛰어들었다.

도무지 유머와는 어울려보이지 않는 주 화백이 툭 던진다. 듣고보니 웃긴다. "다음엔 불쾌한씨 전시회도 한번 하지요, 뭐."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주재환 화백의 '이 유쾌한씨를 보라'. 이 전시회에 대한 소갯말은 하나같이 '기발하고 엉뚱한 발상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2층 전시실은 특히 주 화백의 작가적 장난끼가 만발했다. 이름하여 '1,000원 예술'.

재료도 비닐끈, 쇼핑백, 못, 껌종이, 나무젓가락, X-ray 사진 등 가지가지.

이리저리 오리고, 붙이고, 뚫고, 걸어서 작품으로 태어났다. 제작비로 쓴 돈이라곤 부착테이프나 풀 값 정도가 전부. 그래서 1,000원 미술이다. 표현형식도 다양하다.

개념적 드로잉, 만화, 사진 및 인쇄물 꼴라주, 유화 등등.


40년만에 그럴듯한 첫 개인전

명색이 화가지만 개인전엔 초보다. 붓을 든지 40년만에 처음으로 개인전다운 개인전을 가졌다.

따지자면 1973년 광화문의 한 민속주점에서 아는 사람을 모아놓고 포토꼴라쥬 50점을 선보인 적도 있지만 그저 조촐한 발표회의 성격. 본래 숫기없는 사람이라 이번 일도 주위의 젊은 마니아들이나 화랑가의 재촉으로 어렵게 기회가 만들어졌다.

작품 속에선 20, 30대 청년처럼 펄펄 날아도 현실에 발 디딘 그는 너무 욕심이 없어 옆사람이 더 안타까운 무심의 60대다.

이 전시장에 오기까지 참 먼 길을 돌아왔다. 작가이면서도 늘 다른 직업에 매여 욕심껏 작업해보지 못했다. 유화는 나이 오십에 시작했고, 습한 지하실이나마 작업실이라고 마련한 것 또한 그때. 그리고 4년 전에서야 비로소 다른 짐을 벗고 전업작가가 됐다.

"1960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가 한 학기 만에 그만뒀습니다. 그땐 저만 아니라 다들 어렵게 살던 때라 웬만한 부잣집 자녀 아니면 저처럼 중퇴가 비일비재했거든요.

사실 공부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았구요. 원래 공부도 잘 못 했어요. 초등학교때 어느 겨울인가, 한겨울엔 성적 순서대로 난롯가에 앉히는 반에서 저는 60등 넘는 아이들이 앉는 쪽에서 추위에 덜덜 떨던 기억이 나요. 하하."

그래서 평생 따라다니는 학력은 고졸. 대학중퇴후 곧장 돈을 벌러나섰다. 눈에 띄는 신문 마다 구인란을 뒤져보며 일자리를 찾았다. 행상부터 4년전 출판사일을 끝으로 그만둘 때까지 온갖 직업을 전전. 안해본 일이 없다. 한때 창경궁에서 아이스케키 장사를 했다.

값이 비싸다고 시비를 거는 손님이라도 만나면 파출소에 찾아가기도 몇번. 피아노 외판원 노릇도 했다. 눈에 들어오는 피아노 교습소마다 찾아가 피아노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영업 실적은 낙제점. 넉살이 좋지않은 그에게 선뜻 사겠다는 고객이 없었다. 1968년 김신조 간첩단 사건으로 온 나라가 비상이었을 땐 원남동 파출소의 방범대원으로도 일했다. 통금이 있던 당시 한밤중 4시간 동안 일대 순찰을 돌며 취객들을 추스리고 살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누드미술학원 개원

그래도 미술 가까이 직업을 얻은 건 행복한 동행이었다. 사업 비슷한 것도 했다.

시장 근처의 한 빌딩주인 아들의 제안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누드미술학원이란 것을 열었다. 신문광고도 요란하게 내니 금새 장안의 화제가 됐다. 흑백 TV 시절 그 일로 방송전파까지 탔다. 지금으로 치면 벤처사업 경영자였다. 그러나 결론은 또 실패.

모델은 몰려들었지만 회비운영이 여의치않아 화제만 뿌린 채 막을 내렸다. 극빈자학교인 천호동 고등공민학교에서 2년간 시간강사로 미술을 가르쳤다. 월급 8,000원.

자신의 박봉도 박봉이지만 아이들이 월사금을 못내는 것은 물론, 점심시간이면 제때 점심을 먹는 아이들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가난한 아이들의 선생 노릇도 학교 재정난으로 곧 끝나고 말았다.

이후 출판계로 진출했던 주 화백. 고교 선배의 소개로 한국 민속극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잠시 근무, 1970년대 중반엔 고전이나 문예이론서 등을 펴내는 민학사에 취직했다.

이쯤에서 정착? 아니다. 가는 곳곳 문을 닫는 유쾌한씨의 불유쾌한 행보는 계속됐다. 민학사 역시 책을 몇권 내는가 싶더니 경영난으로 폐업. 그후 출판사 몇 군데를 더 옮겨다녔다.

길거리를 헤매던 때보다야 호사로운 직업이었지만 돈버는 운은 할 수 없었다. 월간 '미술과 생활' 기자, 월간 '독서생활' 편집장 등으로 돌던 끝에 한 미술전문출판사에서 약 8년을 근무한 뒤 미술작업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이 50이 되니까 제 자신에게 궁금해지는게 있는 겁니다. 청년기부터 미술에 대한 꿈을 꿨지만 늘 생활에 쫓기다보니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뤄지지도 못했고, 시간은 자꾸 흐르고, 기회도 줄어들고..

지금이라도 내가 충분히 긴 시간을 갖고 작업에 전념해나간다면 무엇이 나올까, 그게 궁금한 겁니다. 그래서 쉰살 때 처음 내 작업장을 만든 뒤 나중엔 직장까지 모두 정리하고 미술만 생각하기로 했죠.

처음엔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만둔지 2년뒤부터는 눈에 띄게 작업량도 늘었고 주위의 반응도 조금씩 나타나면서 비로소 마음이 놓였습니다."


세상에 대한 애정이 깔린 작품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굳이 찾지도 않았다. 회화나 설치, 만화 등등 그가 선보이는 모든 기법은 청년시절 바쁜 직업전선 사이에서도 빼놓지 않고 쫓아다니던 전시회에서 알게 모르게 배워졌거나 자신의 연구와 상상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작품은 따뜻하다. 겉으론 시종 재기발랄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대한 애정이 바탕색처럼 깔려있다. 이론에 들뜬 애정도 아니다. 자신이 스스로 한 서민으로서 세상을 떠돌았던 체험이 켜켜이 녹아있다.

개인전엔 게을렀어도 미술가로서의 울타리는 벗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중심부에 있었다.

기득권 아닌 재야의 궤도에서 20여년을 보냈다.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을 비롯해 1985년엔 민족미술협의회의 창립회원으로, 1987-1988년엔 공동대표로 활동했고, 1986년 장준하 기념비 건립에 참여, 1987년엔 고 박종철 추도 '반고문전'을 열기도 했던, 현실참여 작가중 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세상 삐딱하게 돌아가는 꼴을 보면 당뇨기운에 조심하라는 술을 소주 반, 물 반 섞어 마셔가며 지인들끼리 넋두리를 주고 받는게 일이다.

"민미협 활동땐 전시회에 걸렸던 그림 때문에 경찰서에 불려가 닥달을 받은 적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뭐 말할 거리가 되나요. 80년대엔 저만 아니라 다들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가 공유돼 있었고, 저희는 미술가들로서 서로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뭔가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내보자는 거였지요."

나이가 들수록 예술은 더 잡히지 않는 무엇이다. 젊었을 땐 오히려 뭔가 알 것 같더니 가면 갈수록 미궁이다. 그에겐 예술이 거창하지 않다. 작업조차 하고 싶을 때 하고, 말고 싶을 때 만다.

한창 에너지가 솟을 땐 간혹 밤까지 새가며 휘몰아치듯 작품을 내놓기도 하지만 아주 드문 일이다. '창작한다고 밤새는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아직도 생활전사의 굳은 살이 박힌 소탈한 작가다.


"작품엔 그자체의 운명이 있는 생명체"

"작품이란 건 참 이상합니다. 만들면서 짜릿한 쾌감도 있지만 잘 안 풀릴 땐 그만한 고통도 없거든요.

제 보기엔 작품도 작가가 만드는 게 아니라 뭔가 보이지 않는, 그 자체의 운명이 따로 있는, 묘한 생명체 같아요. 작가가 열정을 다하는 거야 어느 작품이나 똑같을 텐데 어떤 건 신기하도록 잘 풀리는가 하면 어떤 건 아무리 애를 써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걸 보면 말이죠."

신비하기로 치면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만큼 신비한 창작은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의 결혼은 늦었다. 마흔살에 들어서야 알고지내던 미술평론가 동생과 가정을 이뤘다.

지금도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그만. 애초에 그림으로 큰 돈을 번다는 생각은 별로 기대해보지 않았다. 지난 시절 몇번 그림을 팔아보긴 했다. 그러나 어쩌다 가물에 콩 나듯. 그런 날은 복권 당첨 소식만큼이나 뛸 듯이 기뻤다.

야심이 없기에 눈치볼 것도 없다. 이제와서 주목을 끈들 나이 예순에 새삼 무슨 부귀영화를 노리랴. 그래서 그의 미술은 한없이 자유롭다. 알아주면 고맙고 몰라줘도 섭섭치않다. 학연이나 지연이 없어 운신도 자유롭다. 앞으로도 무계획이 평생 계획.

내년 일이 어떻게 될지 본인이 더 모른다. 우선은 이번 서울 전시를 필두로 몇몇 대도시를 더 돌다가 나머지는 붓 가는대로, 팔자 소관대로 사는 것. 그게 주 화백이 골라낸 인생 시나리오다.

작품을 보다말고 엉뚱기발한 유쾌한씨에게 이런 시비를 걸어보았다.

"혹시 이것도 예술이냐고 하는 사람은 없던가요?" "직접적으로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 못봤습니다."

"그럼 만약 누군가 정말 선생님께 그렇게 말한다면 뭐라고 하실 건데요?" 간발의 차도 없이 주화백은 대답한다. "미안하다고 그러죠 뭐. 미안하다고, 반성하겠다고."

작가의 손을 떠나면 이미 그 작품은 관객에게 소유권이 이전된거라고 믿는 유쾌한씨. 수류탄처럼 터져버린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전시실은 잠시 진공상태에 빠져들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2000/12/12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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