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화제작, 무삭제로 다시 보기

비디오 출시 초창기에 가장 인기 있었던 배우는 알랭 들롱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삼부, 라이프, 동양 등의 중소 제작사에서 '알랭 들롱 필생의 하이라이트' 운운하며 고만고만한 액션물까지 40여편이나 쏟아놓았다.

초창기 출연작인 <로코와 그 형제들> <태양은 외로워> <표범>과 같은 수작들은 완전히 외면당한 채 <루지탕> <암살자> <형사 로저> <필립의 야망> <페세지> <스콜피오> 등 <볼사리노>의 흥행에 힘입은 형사ㆍ범죄 액션물이 주로 출시되었다.

물론 이들 작품에 묻어 출시된 <미스터 클라인> <암흑가의 세 사람> <사랑의 음모> <시실리안> <고독> 등 빼어난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전체 필모그래피를 모르는 이들은 알랭 들롱을 얼굴 반반한 프랑스의 액션 스타로만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들 비디오의 상영 시간이 한결같이 90분이라는 점이다. 국내 제작사들이 90분짜리 비디오에 구겨넣기 위해 영화를 멋대로 잘랐기 때문이다. 초창기 비디오 시장의 무지막지한 관행은 오늘날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다.

<제 5원소>의 국내 개봉 즈음에 내한했던 프랑스 감독 뤽 베송이 자신의 영화가 잘려 개봉되고, 출시된 사실을 알고 (그것도 공동 기자회견장에서 질문하던 기자의 말에 묻어나와 알게된 것이었다.

그걸 제대로 통역해주지 않으려던 수입사의 치졸한 행동이 보도되어 더 욕을 먹기도 했다)항의하자 수입사가 영화를 다시 붙이고, 비디오 <그랑부르>의 완전판을 내는 등의 소동을 일으킨 사실은 그래서 더더욱 씁쓰름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국에서 자신의 영화가 잘리거나 뿌옇게 화면 처리되어 개봉되는지 모르는 감독은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영화 선전을 위한 전단 문구 하나, 사진 한장도 직접 챙기고 관리하는 스탠리 큐브릭 같은 열성 완벽주의자 이야기는 신선한 일격이었다.

그러나 세계 영화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니까 그렇지, 한두 작품으로 이름을 겨우 알린 정도의 감독이라면 이처럼 당연한 권력 행사도 한국에서는 불가능했으리라.

최근 무삭제판을 강조하며 채출시되는 비디오가 적지 않다. <원초적 본능> <쇼걸> <베티블루> <칼리큘라> 등이 재출시된 것만 보아도 영화 자르기가 얼마나 많이 행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영화는 신체노출 등의 문제로 잘렸다가 최근의 심의완화로 재출시된 것이다. 즉, 야하다고 소문난 영화여서 잘린 부분을 복원했다고 선전하면 장사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혹은 <헬레이저> 시리즈처럼 최근의 잔혹, 엽기 분위기 덕분에 기본 장사는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공포영화들이 다시 햇빛을 보기도 한다. 야하지도 않은 주제에 상영시간까지 길어 두개의 비디오에 나뉘어 출시해야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심의와 상관 없이 제작사의 자의로 잘리기 일쑤인 것이다. "상영 시간이 길어서", "관객이 너무 지루해할까봐" 라는 것이 제작사의 변명인데 그걸 왜 제작사가 판단하는지.

한가지 다행인 것은 소위 희귀 비디오라는 것들, 출시된지 오래되어 찾아보기 어려운 명작이 드물게나마 재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분노의 주먹> <택시 드라이버> <허공에의 질주> <비열한 거리> <스미스 워싱턴에 가다> 등이 재출시되고 있어 영화팬을 기쁘게 하고 있다. 자켓 디자인까지 세련되게 손을 봐 '구닥다리 영화'라는 고객의 편견을 씻는데 한몫하고 있다.

옥선희 비디오칼럼니스트

입력시간 2000/12/12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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